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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게 누구지? 저희 구면 아니에요?”

 

“아닌데요, 저는 오늘 대배우 형준님을 처음 만나는데요.”

 

“아닌데, 분명 만난 적이 있는데.”

 

그렇게 수많은 규칙을 철저하게 확인하는 국가 치안소 직원분께서 기억력이 좋지 않으실 리는 없고. 눈썹을 추켜세웠다. 오랜만에 직접 마주하고 듣는 그 목소리는 잠뜰에게 비수를 꽂는 듯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하필 오늘 보러 간 영화가 무대 인사가 있을 게 뭐람. 잠뜰은 공짜 영화표라는 말만 듣고 덥석 가겠다고 한 과거의 말을 후회했다. 셀카를 요청하는 팬들에게 브이하며 흔쾌히 사진 찍어주던 남성은 성큼 걸어와 잠뜰에게 굳이 말을 걸었다. 혹시나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가장 구석진 자리로 바꿨는데도, 강렬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던 대배우의 눈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인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나 잡혀가라고 홍보하는 거 아닌가? 상영관 출구에서 대기하던 감독이 행사를 마무리하려는 말을 꺼내자 잠뜰은 서둘러 그의 등을 떠밀었다. 원래 잠뜰이 앉아야 했던 가장 앞좌석에서 다른 조연과 셀카를 찍던 필립은 뒤늦게 잠뜰이 있는 곳을 돌아보고서 상황 파악을 마친 상태였다. 계단을 내려가던 형준은 자연스럽게 그에게도 인사를 건네고 출구로 향했다. 십년감수 했네, 진짜. 형준이 제 앞에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는지, 사람들이 하나둘 잠뜰을 향한 시선을 건네는 게 느껴졌다. 저 사람이 누군데 아는 척을 해? 글쎄, 그냥 친구 아닌가. 힐긋 쳐다보고는 수군거리는 목소리에 괜히 눈치 보였다. 혹시 알아보는 사람이 또 있을까 잠뜰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뜰 님, 있잖습니까.”

 

“내가 밖에서는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아, 선배. 이럴 줄 알았으면 저만 보러 오는 거였는데, 죄송합니다.”

 

“난 괜찮아, 그래도 영화는 재밌었으니까. 수현 씨가 블랙의 신입들 놀다 오라고 준 건데, 우리가 보러 가야지.”

 

그게 하필 아직 흥행하는 ‘격렬의 다이노맨’이라는 게 문제지만. 잠뜰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한동안 조용하게 지내나 싶었더니,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심판자의 일에서

도망친 지 한 달은 지났지만 아무래도 지금도 조심해야 하는 건 여전했다. 국가 치안 관리소의

상관을 죽이고 혁명에 가담하는 부하, 아니, 직원이라는 꼬리표는 어느 곳에서나 돌고 있었고, 보안상으로 공개되지 않은 제 얼굴을 당연히 모르는 시위대 사람들은 잠뜰이라는 이름만 쥐고서 그의 행방을 묻는 말들을 던지고 다녔다. 치안 관리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든든한 아군이라도 만난 모양이겠지. 어떻게 해서라도 잠뜰을 영입하려고 하는 사실은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길거리 시위대와 블랙은 전혀 다르게 움직이는 무리라는 걸 알지만, 결국 같은 목적을 바라보는 국민이다. 하지만 잠뜰은 체계적으로 개편되고 활동하는 블랙의 도움으로 숨어 지내는 게 편했다.

 

 

제발 다시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자꾸 동선이 겹치는 게 거슬렸다. 기지로 돌아가기 전에 밥이나 먹고 가자며 들린 국밥집이 어째서 ‘격렬의 다이노맨’의 회식 자리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보통 더 맛있는 데로 가는 게 맞잖아. 그런 잠뜰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치 동창이라도 발견한 듯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오는 ‘그’ 배우였다. 형준 씨, 아는 사람이에요? 제 친구들이에요,

라며 굳이 잠뜰의 옆에 앉아 자연스럽게 국밥을 시키는 모습이 기가 찼다. 그걸 또 잡지 않고, 친구들이랑 편하게 얘기하라며 떨어진 자리에 앉는 그의 동료들도 괜히 미웠다. 한편으로는 그다지 마주치고 싶지 않던 인물과 마주 보며 대화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한번 밖에 만나지 않았는데도 저를 잘 기억하시네요.”

 

“제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어간 A의 길이었는데,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도 이런

기억은 잊지 못했을 거라 생각해요.”

 

제가 정말 죄송하네요. 두 사람의 대화를 애써 모른 척하며 국물 후루룩 마시던 필립을 괜히 한번 쏘아보며 잠뜰도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그건 말이죠. 옆에서 물컵을 내려둔 소리와 함께 정적이 잠시 돌았다. 이제야 할 말을 고민하는 건 아닐 테고. 세 사람이 앉은 구석진 자리에서 가장 멀리 위치한 배우들의 왁자지껄한 회식 소리가 사람 별로 없는 식당의 정적을 계속 흩트렸다.

 

“요즘 뜰리오트로프가 전과는 달라졌다는 건 알고 계시겠죠?”

 

“무려 치안 관리소의 직원이었던 제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아, 역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안다더니. 누구 덕분에 지금 상기되었습니다. 이를 꽉 물고 밥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잠뜰의 심정을 형준은 모를 것이다. 하하 웃는 그의 앞에 새 국밥이 놓였다. 잠뜰과 필립은 밥을 거의 다 먹을 상태였는데, 이제야 밥을 먹기 시작한 그 모습에 필립이 잠뜰에게 눈치를 줬다. 조금 더 천천히 먹지 않겠냐는 뜻. 어쨌든 같은 자리에서 식사하는 손님인데, 먼저 먹고 일어나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잠뜰은 한숨 쉬고 잠시 몸을 뒤로 기대었다. 고개를 들어 식당을 둘러보던 시선에는 곧 수리할 예정이라는 표시가 붙은 감시카메라가 두 대 있었다. 사각지대가 없는 공간인데도 철저하게 두 대나 설치하고 떠난 뜰리오트로프 정부에 감탄했다. 이번에 감시 범위를 넓힌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도 잠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듯, 필립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잠뜰의 목소리에 조용히 밥 먹던 형준의 손도 점점 느려지는 게 보였다. 앞으로 우리 심판자님께서는 할 일이 많아지겠네요. 옆에서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자꾸만 심기를 건드렸다. 저 거기에서 도망쳤는데, 그거 모르시나? 어머, 그러면 저는 지금 수배자랑 같이 있는 건가? 계속 그런 말 할 거면 먹던 그릇 뺏어버린다고

으름장을 내서야 형준은 꼬리를 내리고 다시 밥을 조용히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이번에 감시카메라 재활성화하면서 규칙도 새로 만들었대요. 지난번에

적용된 규칙 대부분은 폐지된다는 공고도 올라왔잖아요."

 

“그걸 우리 배우님께서는 어떻게 아실까요?”

 

“아, 저희 매니저님께서 새로 취업한 관리소 직원이랑 친한 사이시거든요. 덕분에 앞으로는 제가 관리소에 소환되는 일이 있더라도 C로만 들어갈 수 있겠네요.”

 

“그럼 저는 앞으로 형준님의 비리를 상부에 보고하면 된다는 말이겠죠?”

 

“에이, 어차피 못하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떡해요. 그리고 우리 사이에 이런 건 이제 봐줄

수 있지 않나요.”

 

“지금이 겨우 세 번째 만남이거든요.”

 

“그 정도면 우리 셋은 구면이라고 할 수 있는 사이 맞죠? 그리고 혹시 몰라요, 더 자주 볼 수 있을지도.”

 

이제 길거리에서 예술 활동을 금하는 규칙이 사라져서, 외부 행사도 자주 나갈 예정이거든요.

대충 그런 대화를 나눴다. 지금까지는 길에서 팬을 만나도 사진을 찍어주지 못했다는 설움이

있었고, 배우로서의 활동도 많이 하지 못하니 많이 슬펐다고. 원래 영화 찍고, 드라마 찍고, 그것만 하면 적당히 돈 버는 게 배우 아닌가? 형준이 들었다면 바로 한마디 했을 잡생각을 속으로만 하는 잠뜰이었다. 그리고 그는 형준이 그릇을 비우면서 했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내 일을 하면서도 자유로울 수가 없는 현실이 참 답답하다고. 잠뜰은 제가 심판자로서 사람들을 심판하던

기억이 순간 떠오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영화는 재밌게 보셨어요?”

 

“네, 수현 씨. 보고 오면서 예상치 못한 일들이 많긴 했지만.... 아무튼,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회의 있다고 들었는데.”

 

“내일부터 밖으로 나갈 사람들끼리 계획을 세웠습니다. 한 달 전에 벌어진 관리소 직원의 죽음과 감시카메라의 파괴로 확실한 변화가 생길 줄 알았는데, 규칙에 대한 뜰리오트로프의 시선은 여전하네요. 감시가 점점 심해질 듯하여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앞으로는 외출을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괜찮았더라도, 아니..., 표정을 보아하니 예상치 못한 일들이라는 게 그다지 좋지 않은 일이었나 보네요."

 

“네 뭐 그냥.... 저를 아는 사람을 만나서요.”

 

“그래도 오늘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잠뜰 씨가 저지른 살인 같은 경우에는 A로 해결될 정도가 아니니까.”

 

“제가 누구들 때문에 그런 짓을 저지르고 도망쳤는데요.”

 

“블랙으로 오신 건 환영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유감일 뿐입니다.”

 

“네, 그러시겠어요.”

 

투덜거리는 잠뜰에게 수현이 종이를 한 장 건넸다. 앞으로 새로 적용될 규칙들이라고 하네요.

정갈한 글씨체로 정리된 규칙 공고문은 생각보다 많은 규칙이 없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감시카메라를 쳐다보지 말아야 할 것, 그리고 7시에 방송을 시청해야 한다는 것. 물론 이 방송도 주에 한번이 아니라 두번으로 늘어났다. 형준의 말처럼 예술활동에 대한 규칙은 폐지되었으나, 소비생활 부분에서 새로운 규칙이 생겼다. 마트에서 물건을 구매할 경우, 앞으로 모든 구역에 설치될

검색대에서 검사받아야 할 것. 아무래도 잠뜰의 상관이었던 라더의 죽음 때문에 새롭게 적용되는 규칙 같았다. 무기를 소지할 기회를 주지 않는 철저함이란.

별생각 없이 읽고 있었으나, 표정이 심각해 보였는지 수현이 눈치를 보며 잠뜰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앞으로 저희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려고 해요. 이번에 블랙에 새로 영입된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다음 주부터 그들과 함께 블랙의 목표를 모두에게 알리려고요. 국가가 규정하는

방송을 시청하는 시간과 비슷한 시간대에 영상을 송출하자는 제안도 나왔고, 지난번처럼 치안

관리소를 드나들면서도 사람을 더 모으려고요. 감시카메라의 부재로 한동안 혼란에 빠졌던

관리소 직원들의 심리를 파고들어야 해요.

잠뜰은 제가 관리소에서 사람들을 심판하던 한 달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규칙을 어겨 제 앞으로 소환된 사람들도 있지만, 잠뜰이 전달받은 자료 영상들과 녹취록 속에는 규칙을 지키는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감시카메라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던 사람들도 존재했다. 몇몇은 감시받는 구역을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기도 했다. 그땐 사각지대도 없는 뜰리오트로프 안에서 도망치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이 마냥 우습게 보였는데, 관리소에서 나온 도망자 신세로 세상을 바라보니 이 국가는 달라진 게 없는 듯했다. 블랙의 움직임을 필두로 뜰리오트로프의

규칙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국가가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았다. 하지만 감시 체제를 더 철저하게 준비하는 자세에 골머리 아팠다. 카메라가 수리되지 않은

사각지대 또한 시간이 지나면 국가의 감시를 피하지 못하는 구역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 전에

블랙이 빠르게 움직여주길 바랐다.

사람들이 원하는 자유가 얼마나 위험한 것이길래 국가는 그토록 통제하려는 건가?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면 책임이 따르지만, 규칙을 지키는 것에도 각자의 책임이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지날수록 기지 밖으로 쉽게 나가지 못하는 잠뜰의 현실이 라더가 제게 말한 자유를 원한 대가이자 책임의 방식이겠지. 잠뜰은 종이를 대충 접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쉬었다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기지의 통로 끝에 있는 다용도실로 향하던 중, 덕개의 집무실에서 막 나오는 필립이 보였다. 잠뜰의 손에 들린 안내문을 발견하고 혹시 제가 가져가서 읽어봐도 되냐고 묻길래, 흔쾌히 후배에게 종이를 넘겨줬다.

 

“오늘 회의 또 있었어?”

 

“아뇨, 다음 주부터 실행할 계획을 자세하게 알려준다고 하셔서요. 한동안 제가 관리소에 자주

소환될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전합니다....”

 

다른 말은 더 꺼내지 않았지만, 한숨을 길게 뱉은 필립의 미래가 벌써 그려지는 듯했다. 그 관리소에 자주 드나들던 사람이 또 있긴 했지. 잠뜰은 제가 소환했던 수현을 떠올렸다. 수상할 정도로 집무실로 집무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한 발걸음. 누가 봐도 수상했던 쪽지. 1900. 그리고 수현을 심판한 후에 만났던 또 다른 '블랙'. 그러니까 얘도 그런 역할이라는 거지? 굳이 규칙을 어기고, 그에 대한 교육을 받으러 가면서까지 사람 모으러 다니는? 생각보다 대범한 임무를 맡은 후배가 C 혹은 B, 어쩌면 심판자를 설득하기에 실패하여 A로 걸어 들어갈 수도 있는 미래를 상상하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네가 나 대신 고생이 많다. 아 선배 너무해요. 필립의 짧은 절규가 복도에 울려 퍼진다. 집무실 문을 연 덕개가 얼른 돌아가기나 하라며 두 사람을 쫓아냈다.

 

필립아. 네, 선배. 넌 무섭지 않아? 당연히 무섭죠, 선배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여기에 붙어있는 건데. 내가 살기 위해서 널 고발할 수 있어도? 갑자기 무섭게 왜 그래요. 장난이야, 장난. 그런

말을 하는 거 보면 선배는 국가가 두려우신가 봐요? 만약 그렇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 에이, 그때 선배가 저 보고 자기 믿으라면서요. 그땐 그랬지. 사람들을 가차 없이 심판하던 선배가 국가에 대한 심판을 두려워할 리가 있나요. 이야, 우리 후배님이 생각하는 나는 이런 성격이구나.

 

“난 절대로 국가가 두려웠던 적은 없어. 내가 팀장을 죽였다는 건 아직도 후회되는 일이지만.”

 

“그 말 되게 모순이라는 건 알죠? 자유에는 책임이 뒤따른다는 말도 잊지 않으셨잖아요.”

 

“맞아, 심판자의 방이 유일하게 자율성이 보장된 사각구역이었지만, 나는 나의 심판에 언제나

책임을 져야 했지. 자유가 없는 규칙 속에서도 책임은 언제나 존재했어. 그런 지긋지긋한 규칙이 싫었던 건 사실이니까 무섭지는 않아.”

 

아아 라더 선배, 무능한 후배인 제가 없는 그곳에서는 행복하시길.... 여태껏 한 번도 그리워하지도 않던 사람의 이름을 갑자기 외치는 잠뜰의 모습에 필립이 웃음을 터트렸다. 팀장님을 죽인 사람은 선배가 아니라 저잖아요. 정말? 선배가 그때 저보고 와달라고 하셨잖아요. 아, 그랬나. 네, 그러셨어요. 그럼 너도 이제 무서울 건 없겠네. 그게 그렇게 되네요. 관리소에서 도망친 뒤로 언제나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자신의 칼을 힐긋 내려다보며 필립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는 시간이 늦었다며 제 집이 있는 방향으로 먼저 향했다. 블랙이 구해준 집들은 감시카메라가 아직 설치되지 않았지만, 언제 또 국가의 수사망에 걸려 자유가 사라질지 모른다. 잠뜰도 제 집이 있는 방향으로 향해 복도를 걸었다.

마주칠 일이 거의 없던 팀장을 향해 필립이 무기를 휘두른 건 한순간이었고, 잠뜰이 그곳에서

도망쳐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한순간이었다. 블랙과의 신뢰, 그리고 선배와의 신뢰로 두 사람은 뜰리오트로프에 저항하는 길을 택했고, 직장 선후배로 시작된 관계는 혁명이라는 목표를 함께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깟 혁명의 불씨가 뭐라고. 국가의 규칙과 개인의 평판을 위해 헌신했던 자세가 이렇게 쉽게 변할 수 있다는 것도 지금 생각해보니 웃겼다. 블랙에 들어가겠다고 다짐한 이유도, 고작 잠뜰 본인의 자유 때문이라는 것도 그들은 아직까지 모를 것이다. 이제는 얼굴도 이름도 팔린 신세의 잠뜰이지만, 같은 뜻을 함께하는 자들을 위해서라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딘가 있을 것이다. 팀장님, 아니, 라더 선배, 앞으로 저는 저와 국민들을 위한 심판을 해야겠어요. 국가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건 전부 부질없다는 사실을 이 선배 덕분에 알게 되었네.

 

“일정이 미뤄졌다고? 설마 보안팀에서 우리를 찾아낸 건가?”

 

“그런 이유로 밀린 건 아니긴 한데요.... 수현 씨가 내일 있을 팬사인회에 당첨됐다고 하셔서요. 덕개 씨가 무조건 가야 한다고, 계획 일정이 하루 미뤄졌어요.”

 

“대체 팬사인회에 누가 오길래 그렇게까지 간절하신 건데?”

 

“정형준 아시죠? 저번에 만났던 배우요. 길거리 예술활동 금지 규칙 폐지되었다고 처음으로 백화점 앞에서 단독 팬사인회를 연다고 하네요.”

 

풉. 아침부터 빈속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던 잠뜰이 익숙한 이름을 듣자마자 뿜었다. 그 사람은 정말 잊기도 전에 나타나는 거 아니야? 무슨 배우가 길거리에서 팬사인회를 열어, 유명한 바둑기사 정도라면 모를까. 필립은 옆에 놓인 휴지를 건네며 하하 웃을 뿐이었다. 알고 보니 두 분께서 그 배우를 무척 좋아하시더라고요. 저번에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도 있다는데, 사진을 찍지 못하니까 인사만 하셨대요. 수현이 저와 필립에게 줬던 공짜 영화표의 진실을 그제야 알았다. 지가 좋아하는 배우가 오는 행사라서, 우리도 좋은 기회로 만나보고 오라고 보낸 거구만. 수현 씨는 안 봐도 괜찮냐고 물었을 때 다음 날에 따로 보러 갈 거라는 대답을 한 이유도 알 듯했다. 아마 그날도 무대 인사가 있었을 게 분명했다. 평소엔 내색하지도 않는 사람이 알고 보니 누군가의 광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기가 찼다. 선배도 같이 가실래요? 어디를? 팬사인회요, 표가 여러 장이라서 저도 같이 가려고 하는데. 절대 안 가, 난 여기 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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