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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경장, 아니 이제는 공경사지. 공경사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통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지금 상황에서 고통이란 콩[각주 : 열대 상록수의 씨앗을 의미하는 단어. 쉽게 말해 커피이다.]이 대략 38% 정도로 은은히 은유되어오고 있는 위장질환을 가속화시키는 것이겠지만, 그렇지만, 그냥. 뭐. 공경사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통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검은 화면에는 스스로의 얼굴뿐이 비쳐진다. 상식적으로 말한다면 당연히 상처로부터다. 공경사는 자주, 그리고 가끔 사무실의 인원들을 그렸다. 사무실이라 함은, 관할서가 알고, 동료들이 알고, 시민들이 알고, 스스로도 아는 미스터리 수사반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경사는 자신의 것을 스스로 귀중히 여김과 동시에 '자신의 것'이라고 통칭되는 것들이 지나치게 많은 절차로, (당장 일주일 내 습득한 단어의 개수만 하더라도 말이다.) 각각의 애정도는 떨어지기 마련이었는데 사람의 형태로 보이는 소중한 것들은 지나치게 기억에서 망상으로 구현되었다. 쉽게 말하자. 그립다는 이야기였다.(이거 정말 쑥쓰럽구만!)

 

 

 

"지금 일이 훨씬 편하지만."

 

 

 

"이곳 사람들도 좋아."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은 당연했다. 이곳을 관할서가 아닌 공룡 기억의 편린, 수마, 학이

잔뜩 담긴 유리병, 낡은 10원짜리를 잔뜩 먹인 붉은 돼지. 도서관이기 때문이었다. 날이 풀려 간출하게

차려입은 큰 옷을 끌어모아 입을 쭉 내밀고 생각을 정리했다. 고통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공룡은 그것을 '과다'로 정의했다. 과도하면 아픈 것이다. 온몸을 잔뜩 비틀어 줄다리기를 끝내면 다음날 몸이 과도한 열기로 인하여 근육통을 기어코 앓게 만드는 것 처럼. 때때로 지나친 사고의 회로는 고통을 동반한다.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에취! 공룡이 크게 재채기 했다. 아, 이런 먼지들. 두껍고 단조롭고 낡아빠지고 흥미로운 책들은 한 곳에 아무렇게나 모아두고, 공룡은 뒷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꽂아놓은 흰 서류

봉투를 꺼냈다.

 

 

 

  오늘 아침, 아니 자정이 지났으니 이제 어제이다. 어제 수사반의 영원한 막내인 덕개 경장이 전해준 것이었다. 자랑스럽고 명예로운 대한민국의 미스터리 수사반 6인 중 승진하지 못한 인물은 딱 두 명이었으며... 원초 아는 이라면 툴툴거리면서 퉁명스럽게 봉투를 넘기고 얼굴이 마주치면 보이지도 않는 두 눈을 잔뜩 찡그려 기분 나쁜 티(그러나 그것이 진심이 아님을 모두가 안다.)를 팍팍 내겠지만 지금은 모두가 성장하여 과거의 허물을 불태우고 난 이후이므로. 선배 잘 지내셨어요? 뭐 이러한 낯 간지러운 태도의 한 마디만 꽂아두고서는 전 바빠서 이만. 보통의 사람들은 바쁜 와중 고작 이런 것을 다른 동네까지 이동해서 전해 줄 여유가 없겠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특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공경사는 밥이나 같이 먹자는 말도 하지 못한 채 손만 흔들어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서류 작성자는 잠뜰 경위였다. 전화로 해도 될 텐데. 하긴, 흔히 전화라는 것은 안심되고 편안한 상호 보장된 친교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가? 경위와 (구)경장 사이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공룡이 실실 거리다가 한 글자씩 조심히 눈에 담았다. 수현 경위-가 전적으로 담당하고 있는 기업형 범죄에 관한 내용들. 수현은 특정 팀에 속해있다기 보다는 인근 관할서들의 공공재 같은 위치라, (수현 경위님 죄송합니다!) 여러 정보들을 탐닉하기 알맞은 위치였다. 아, 부러워. 얼마나 재미있을까. 매여있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불안을 야기하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러운 것은 부러운 것이었다.

 

 

 

  붉은 색연필로 강조 표시된 부분이 있었다. 중간에 색연필이 한 번 부러졌었는지 덧이은 표시가 있는 별 세 개였다. 다급한 상태로 힘을 너무 세게 주셨군. 오른손을 왼쪽으로 기울이면서 엄지로 촉을 끊어먹고. 깔끔한 성격이시니 잘린 잔해는 즉시 쓰레기통에 치우셨겠고. 아차,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닌데. 이런 것을 두고 직업병이라고 한다. 음음, 오늘도 즐겁게 문장을 읽어볼까. 모방한 다른 범죄 행위들은 사전에 적발되거나 성립되지 못함. 간만에 좋은 소식이었다. 아니지, 방금 생각은 두 줄로 죽죽 그어 머릿 속 쓰레기통에 치워버린다. 그러나 연결고리들이 부자연스럽게 끊겨 나간 점으로 미루어보아 앞으로도 주의 요망. 공룡이 주로 하는 일은 아이들의 행방을 찾는 것이었다. 처음과 끝, 화살표, 행선지, 진위 판별. 공룡이 좋아하는 것들이다.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대개 후자들의 결말이 좋지 못했지만 공룡은 전자를 보고 아닌척하지만 마음 아파하는 종류의 인간이어서 이 모든 것들은 고통을 상기시키고 만들어내곤 했다.

 

 

 

  어깨너머로 보고 익힌 것이 있다. 공룡은 금세 자료들을 모아 하나의 퍼즐처럼 구상했다. 큰 퍼즐을 4개로 나누어서, 1 사분면에 비워져 있었던 것은 믿음직한 후배가 넘겨준 조각으로 부분부분 채운다. 3 사분면은 퍼즐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각경위-님이 주력으로 담당하는, 아니 지금까진 진전도 하나 없고 뭐 하는 거야, 물론 그가 맡은 일이 이것들 중 가장 찾기 어렵고 오래 걸리는 것임을 안다. 공룡은 질서 있게 비워져 있는 한 가운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부분은 잠뜰 경위의 몫이다.

 

 

 

  끙. 오랜 사견이 어떤 결론에 도달하자 맥없이 전부 풀어헤쳐졌다. 어쩐지 금세 나을 것 같은데. 고통 말이다. 내일은 잠뜰 경위의 정기 접견 신청날이다. 물론, 상대는 주하은(으로 통칭되는). 그리고 언제나 반려당하는. 또 현재 공경사가 몸담고 있는 곳이 단체로 성화 교도소로 출동하는 날이기도 했다. 출동! 사전적인 경찰로서의 의미가 아닌 모두가 이동한다는 뜻이었다. 지금 다루고 있는 사건에서 도움이 될만한 수감자들이 있었고 그것들 외에도 정기적으로 민원이 들어온 부분을 직접 확인하고, 겸사겸사 본인들이 잡아넣은 범죄자들의 면상, 아니 얼굴도 되새기는...

 

 

 

 

 

  잠뜰 경위는 익숙하게 접견 신청서를 작성한 후, 창구 안으로 밀어 넣었다. 8번, 아니 9번째인가? 경찰로서의 목적으로 직접 심문한다면 거절 따위는 당하지 않고 손쉽게 얼굴을 마주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잠뜰 보다는 수현 경위의 일이라는 것을 잠뜰은 충분히 잘 알았고, 그가 원하는 건 경찰 잠뜰이 아니라 인간 잠뜰이었다. "시간 낭비에요." 그래, 이런 건 시간 낭비에 불과하지만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는 행동이었고 쉬는 날이라고 해서 별다른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 잠뜰에게는 그다지...

 

 

 

"공경장."

 

 

 

  아니, 공경사지. 정말 뵐 때마다. 일부러 그러시는 거죠? 설마, 그럴 리가. 아무래도 입에 붙었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나오는 것 아니겠어? 기억 좀 덧씌워보세요. 자네만큼 쉽지 않은 걸 뭐 어쩌겠어. 컴퓨터도 쉽게 하는데요. 컨트롤 C, 컨트롤 V! 그거 아니지 않나? 어쨌든요.

 

 

 

"어쩐 일이야?"

 

 

 

"사무실에서 다 같이 왔어요. 필요한 게 있어서."

 

 

 

"아, 지금 맡고 있는 게 강도 사건이던가?"

 

 

 

"알면서 왜 물어보셨대?"

 

 

 

"친교지, 친교."

 

 

 

  창구 안에 있던 담당자가 서류를 또 다른 담당자에게 넘기기 위해 잠시 공간을 나갔다. 그렇다면 이 공간에 남아있는 사람은 둘이 전부였다. 미스터리 수사반보다 작은 크기의 공간. 그러나 인구 밀도로 따지면 그때 보다 넓다. 대신 둘의 사이는 가까웠다. 그때보다 훨씬 더. 공룡은 프리마를 잔뜩 넣은 커피를 홀짝거렸고, 잠뜰은 물이 절반도 채 남지 않은 종이컵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돌렸다.

 

 

 

"아프다면서 커피는 왜 자꾸 먹고 그래?"

 

 

 

"적정량의 커피는 뇌 혈류량 개선에 많은 도움을 준다고요."

 

 

 

"하루 넉 잔이?"

 

 

 

"...어떻게 아셨어요?"

 

 

 

  척보면 딱이지. 아, 찍으셨구나! 찍는 것도 능력이야. 실없는 대화가 나쁘지 않게 서로 오고갔다. 공간 바깥에서 사람들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소리가 작고 무겁게 들렸다.

 

  안 오네. 평소에는 금세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거부당했다는 사실을 대신 전하고는 했다. 그것은 전혀 담당자의 잘못이 아니었는데도. 그런 상황이 오면 잠뜰은 실례했습니다. 특유의, 약간의 혼재된 불안한(다른 이들에게 그러한 감정을 부여하는) 미소를 애써 감춘 채로 뒤 돌아가곤 했다.

 

 

 

"그나저나."

 

 

 

"?"

 

 

 

"자네는 일 안 하고 여기서 무슨 땡땡이야."

 

 

 

"제가 언제 땡땡이를 쳤다고."

 

 

 

"지금. 바로 여기서."

 

 

 

"헐~ 상급자 비위 맞추는 것도 업무의 일환이라고요."

 

 

 

"그렇다면 지금 아주 실패하고 있는 건데."

 

 

 

"성공한 것만이 업무인가요?"

 

 

 

"어."

 

 

 

  공경사는 말이 없었다. 그 대신 좁은 공간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정신 사나운 그의 오랜 버릇이다. 정적이 길었다. 오랜만에 둘이 살가롭게 담소나 나누라고 또 다른 상급자들이 배려한 거겠지. 어떤 기자와 누군가의 소문이 미스터리 수사반의 업적을 과하게 칭송해버린 것 때문에 경찰 내부에서도 여섯명을 우상화시키고 멋대로 기대하고 마음껏 편의를 봐주려는 경향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필요 없었지만, 사람이 언제나 좋은 것만을 몸에 걸치고 살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잠뜰은 그런대로 참았다.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나중에 생각지도 못하게 내게 아주 큰 도움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예전에는 동료라는 관념이 그랬다.

 

 

 

"요즘에는 어떤 일 하세요?"

 

 

 

"바빠. 간이 수사팀도 하고. 공부할 것도 많고. 이 근방 살인 현장에는 언제나 내가 있어."

 

 

 

  그것 참 연쇄살인범 같은 대사군요. 그런 말이 하고 싶은 듯 공경사가 근질근질한 얼굴과 태도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다 알아 요것아. 대충 그러한 함의가 숨은 얼굴로 무표정하게 바라보자 공경사가 웃긴 듯 실실거렸다. 형광등이 깜빡거렸는데, 공간의 정중앙이 아닌 미묘한 위치에 달려 있던 것 때문에 빛이 공경사에 막혀 잠뜰에게 닿지 않았다. 그것을 자각했는지 공룡이 살며시 몸을 치웠다. 눈이 부셨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잦았는데. 오랜만에 목격한 시츄에이션 이었다.

 

 

 

 

 

  두 눈을 깜빡깜빡 거리던 수경위가 졸음 섞인 하품을 익숙하게 애써 뒤로 보내며 포스트잇이 붙어있는 파일을 열었다. 종이를 휘적거리며 활자들의 정보를 휘적거리다 보면, 충분히 알고 있는 것들이다. 서류 처리를 부탁한 순경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요즘에는 영 수확이 없네. 응. 쓸게 하나도 없어. 한숨 쉬며 안에 들어있는 내용과는 다르게 어쨌든 따끈따끈한(실제로) 파일을 이미 끌어다 쓴 다른 파일들의 옆에 꽂은 수경위가 전화기를 들어 익숙한 번호로 다이얼을 돌렸다. 전화는 금세 연결됐다.

 

[어, 토끼 경위.]

 

“각경위님, 안녕하셨어요?”

 

[며칠 전에도 전화했으면서 뭘. 어쩐일이야?]

 

  수화기 너머로 킬킬거리는 목소리와 전자 제품들의 제각각 깜빡거리거나 지지직 거리는 소리가 건너 들어왔다. 무언가 파지직하고 튀는 소리도 들리는데, 감전 안 당하나 몰라. 다음 4월에는 꼭 절연 물품을 선물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냥, 뭐. 수사 현황이나 전해 들으려고요.”

 

[별 다를 건, 아. 그 명광파 녀석들의 시스템을 어줍잖게 모방한 패거리들이 지방에서 잡혔다는 얘기는 했었나?]

 

“아뇨. 그렇게 귀중한 이야기를 왜 지금 하시나요?”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잠깐 까먹을 수도 있지. 참.]

 

“어떤 점을 모방했는데요?”

 

[그, 왜. 어린 애들 잡아 와 교육시키고 본인네들이 써먹는 것 말야. 애들에게 쓸 돈이 부족한건지 뭔지 명광파 녀석들처럼 구조화해서 세뇌도 못했고 상태들도 안 좋더라고. 조직 덜미가 잡힌 것도 두목이라는 놈이 몇 년 전 폭행 교사 범인으로 잡혀 복역하다 겸사겸사, 뭐 그렇게 된거지.]

 

“아이 키우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인데, 깡패들이 본인 뜻대로 기를 수 있을 리가 없죠.”

 

  뼈가 있는 말이네. 뭐가요? 명광파가 정말로 단체로 돌아버린 단체였던 거고요. 그래그래, 넌 별일 없고? 별일이야 있겠나요. 그렇겠지. 하늘 같은 선배는 늙어도 영원히 수사반에서 굴러다니느라 근육통이 몸에서 떠날 생각을 않는데 넌 매여있지도 않고 고문관 역할에만 충실하니. 말을 왜 그렇게 하세요. 아니, 뭐.

 

  전화기 너머 목소리가 잠시 뜸하더니, 각경위가 느리게 말을 건넸다.

 

[지금은 어디라고 했지?]

 

“요즘은 여성청소년과요.”

 

[어디가 됐든 정착해.]

 

“각경위님이 할 말은 아닌 거 아시죠?”

 

[왜 그래? 난 엄연히 속해 있는 수사반이 있는 몸이야. 그건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고. 수사반이 없는 건 너밖에 없잖아?]

 

“참나. 저는 재원이라 여기저기서 불려 다닌다고요?”

 

  어쭈구리. 각경위가 웃긴 듯 실소를 흘린다. 네가 괜찮다면야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재원이라면 오히려 붙잡고 놔주지 않는 소속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에요. 어 그래.

 

[어쨌든, 알겠어. 경위님께는 네가 대신 전해주라.]

 

“네? 잠경위님이요?”

 

[응. 요즘 우리 수사반이 참 바빠요. 나 엊그제 하수구도 들어갔다 왔다.]

 

“세탁 잘하시고요.”

 

  응, 그래. 돈세탁. 이상한 농담이나 첨부하고는 전화가 끊겼다. 장난스러운 태도이지만 각경위는 충분히 수경위를 걱정하고 있다. 걱정할만한 일도 아닌데 말이지. 고용불안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수경위

본인의 의지다. 기지개를 켜며 수현이 침실로 들어가 얌전히 침대에 누웠다. 미스터리 수사반 같이 대형

사건들만 덥석덥석, 미끼나 자석같이 무는 수사반이 아니라면 수현으로서는 이리저리 여러 가지의

사람들을 만나 캐묻고 정리하고 밝혀내는 쪽이 조금 더 적성에 맞았다. 그게 새로운 수사반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라고 한다면 조금은 부족한 변명이었지만. 다시 온전한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힘이 든다. 뻔히

보이는 데 아닌 척 갈무리 짓 하는 건, 자기가 언제 날 걱정했다고 그래? 어이가 없어서 참. 그렇게 말하면서도 각경위란 사람은 드물게 겉과 속이 동일한, 속이 조금 더 따뜻한 사람임을 안다. 수경위가 익숙하고도 낯선 번호를 떠올린다. 잠경위의 집 번호였다. 익숙하지만 평생 전화를 걸 일도, 전화를 받을 일도 없는

번호. 경위님 수사반 번호가 뭐였더라.

 

 

 

 

 

  댕댕이가 자꾸 뜰 누나네 집으로 걸어가려는 것을 한 손으로 제압하고 평소 가보지 못한 산책길을 둘러 걸어가던 라경사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흰 박스를 들고 중얼거리면서 걸어가는 주홍빛 갈색 머리. 누가 봐도 덕경장이였다. 이런 데서 만나다니. 엄청나게 오랜만이었다. 범죄 현장이나 관할서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난 것은 그것보다 더, 더, 더. 최초라고 불러도 될 만큼 엄청나게 오랜만. 라경사는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갔다.

 

 

 

"너 여기서 뭐 하냐?"

 

 

 

"엄마야! 누구세요?"

 

 

 

"누구세요? 오냐, 팀 떠나면 영원히 빠이빠이다, 이거냐?"

 

 

 

"죄송해요, 말이 헛나왔어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

 

 

 

"우리 집 근처야."

 

 

 

  맞다, 여기 저쪽 사거리만 넘어가면 경위님네 집 근처였죠…오늘 출근 안 하시나 봐요? 어, 휴일. 너도? 네. 할머니가 햅쌀로 방앗간에서 떡 쪄오라고 해서 떡 쪄오는 길이에요. 하나 드실래요? 떡 상자에서

덕경장이 꺼내 준 흰 가래떡을 꺼내 입에 넣은 라경사가 덕경장을 위에서 아래까지 쓱, 훑어보았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몸이 탄탄해 보이는 게 근력 운동을 열심히 한 듯 해 보였다. 어깨도 떡 벌어지고, 자세는 말 할 것도 없고. 뭔가 자신만만해 보이는데. 옆에서 괴롭히는 사람이 없어져서 그런가?

 

 

 

"운동 열심히 했나보다?"

 

 

 

"하핫! 티가 나나요? 아니~ 새 사무실에서도 라경사님처럼 운동 좋아하시는 경사님이 있으셔서 열심히 배웠어요! 자세도 이것저것 알려주시고 근력 운동도 시간 날 때마다 해보라고 봐주셔서. 아이, 이거 참. 알아봐 주시니까 쑥쓰럽,"

 

 

 

"나야, 그 경사야?"

 

 

 

"예?"

 

 

 

"누가 더 몸이 좋냐고."

 

 

 

"…당연히 라경사님이죠."

 

 

 

  만족한 듯 라경사가 큰 손으로 덕경장 어깨를 팍, 하고 쳤다. 쿨럭!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은 채로 떡을 질겅질겅 거렸고, 딱히 둘이서 별다르게 이야기 나눌만한 주제가 없었던 나머지 둘은 동시에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럼 전 가볼게요."

 

 

 

"어딜가?"

 

 

 

"예? 떡 할머니 드리고 전 운, 운동해야죠."

 

 

 

"같이 하면 되겠네."

 

 

 

"네? 저 지금 떡 들고 있는데요?"

 

 

 

"무게 안 늘려?"

 

 

 

  한창 둘이 옥신각신 거리고 있을 적에 멀리서 긴 그림자가 나타났다. 뜬금없게도 각경위였다. 이 사람은 정말 최초였다. 바깥에서 목격한 것 말이다.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경찰이 어쩐 일이겠냐? 떡이나 줘봐. 떡인 건 어떻게 아셨대? 라경사가 박스를 열어 가래떡을 각경위에게로 넘겼다. 앓는 소리 내면서 근처 아무 곳에나 앉은 각경위가 둘을 훑어보더니 불만스럽게 말했다. 이 자식들이 하늘 같은 선배는 현장에서 구르고 있는데 한가롭게 떡이나 먹고 말이야. 억울한 목소리로 덕경장이 받아쳤다. 저는 오늘 휴일인데요? 저도요. 휴일이면 일 안 해? 보통 휴일에는 일을 안 하죠? 잠잠했다. 까마귀인지 까치인지 새 우는 소리가 조금 들렸다.

 

 

 

"잠경위님이 뭐라 안 하디?"

 

 

 

"뭘요?"

 

 

 

"뭐겠냐?"

 

 

 

"예?"

 

 

 

"됐다. 니들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요즘애들이란, 하며 중얼거리던 각경위가 토끼 귀 이거, 말 전달을 안 했구먼? 수경위님이요? 어. 뭔데요? 알 거 없다. 아, 네. 일이나 마저 해야지. 일어나서 흙 묻은 부위를 탈탈 털던 각경위가 무언가 생각난 듯 손을 까딱까딱 했다. 일이나 도와라. 네? 오늘 휴일이라니까요! 부조리해도 (전) 상사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을리가. 위계에 의한 것 보다는 각별이라는 인간으로 부터 뿜어져 나오는 무언가의 에너지 때문에 차마 거부할 수 없어 둘은 얌전히 각별 뒤를 따랐다. 뭐, 저렇게 말해도 정말 일하기 귀찮아서 시키는 게 아니라 오랜만에 만난 게 반가워 잠시 잡아둘 이유인 걸 아니까(아마도?).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다.

 

 

 

  시꺼먼 남자 뒤로, 떡 상자를 들고 걸어가는 남자와 강아지를 데리고 걸어가는 남자의 조합은 참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와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는 사건 현장이 아니었다면 근방 어딘가 서커스라도 열린 것으로 착각할만한. 어, 서커스?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월야 서커스가 생각났다. 다시 서커스를 시작한다고 그랬었나, 아니면 다들 흩어져서 공무원 시험이니 뭐니들을 준비한다고 그랬었나. 자세한 건 누나한테 물어봐야지.

 

 

 

"뭔데요?"

 

 

 

"총 맞아 죽었어."

 

 

 

"가정집에서요?"

 

 

 

"우리나라 총기 금지 국가인데."

 

 

 

"어, 그래서 이 집 바깥양반이 도착하면 바로 수사 받으실 예정이시다."

 

 

 

  막바지인 분위기가 아닌 다들 이리저리 열심히 움직이는 모양을 보아하니 다른 곳에 있던 각경위가 연락을 받고 사건 현장으로 가는 도중 둘을 마주친 것 같았다. 일 하러 가는 도중 전 동료 마주하고 떡이나 얻어먹고 노가리나 깠다니. 그의 배짱은 가히 본 받을 만 하다. 라경사가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각경위가 뭐하냐? 말하기 전까지. 덕경장은 옆에서 머리를 부여잡고 중얼거리는 모습이 꽤나 오래 걸릴 듯 하니, 댕댕이를 아는 순경에게 잠시 맡긴 라경사가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근데 저희가 도와도 되는 거예요?"

 

 

 

"낸들 아냐."

 

 

 

"시말서 쓰라고 하면 어떡해요?"

 

 

 

"내 알바는 아니지."

 

 

 

  총 소리를 들은 식모가 신고. 사망자는 중학교 3학년. 이 집의 외동아들. 아버지는 건설회사 중역. 어머니는 가정주부. 일요일이라 그런지 오는 속도가 느리다. 피해자의 부모든, 각별 경위의 팀원이든. 능숙하게 장갑을 꿰어 끼고 시신을 확인하는 각경위를 곁눈질하면 또래와 비교해보아도 말쑥한 몸이 눈에 띄었다. 몸에 근육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잠경위가 더 많이 소유하고 있을듯한…아니, 경찰이니 당연하지. 그럼 우리 엄마를 예시로 들까? 잠시 고민하던 라경사가, 사건 현장의 잔인한 행태에 대한 묘사는 집어치워 보기로 하고, 시체와 거리가 있는 곳에 눕혀져 있는 리볼버를 장갑 낀 손으로 들었다. 6연발. 총알 5개와 탄피 하나.

 

 

 

"총기를 밀수하는 경우가 잦나요?"

 

 

 

"보통은 사냥용을 땡겨쓰는 정도지."

 

 

 

  어느새 간단하게 검시를 전부 끝낸 각경위가 고급 모피 위에 삐뚤하게 겹쳐 앉은 채로 말했다. 저 정도만 봐도 다 보이나? 각경위가 우수한 경찰인건지, 아니면 귀찮은 건지. 근데 아무래도 뭔가가 더 있는 것 같다. 보통 돈 많으면 뒤도 많이 구리던데. 킬킬킬 웃는 모양새가 동화 속 마녀 같았다. 미사여구는 아니지만 어쨌든 라경사도 동의하는 발언이었다.

 

 

 

"머리가 너무 아파요."

 

 

 

"왜."

 

 

 

"하나가 아니에요."

 

 

 

"뭐래니?"

 

 

 

  이 일 하나가 끝이 아니다, 뭐 그런 이야기인가 보지. 어떻디? 음, 아뇨. 라더가 머리를 데굴데굴 굴렸다. 어디까지 침범해도 될지를 생각하는 중 이었다. 뭐, 괜찮지 않을까. 각별이란 남자는 불성실해 보여도 하급자의 주제 없음에 대해서는 관대하니까. 뭐, 총 쏘는 건 평범한 경찰들도 힘들잖아요. 각경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 정도면 정보의 전달이 완벽하겠지. 때마침 딱 들어맞게 문이 열리고 각별의 동료 경찰들이

서서히 들어왔다. 수고하십니다, 저희는 각별 경위님께 요청받아 잠시 수사를 돕고 있었고…그 뿐이다.

나머지 일은 담당하는 경찰들이 잘 매듭지어줄 테다. 라더는 댕댕이를 넘겨받고 아직 상태가 좋지 못한지 맹한 얼굴인 덕개와 현장을 빠져나왔다.

 

 

 

"야, 정신 차려."

 

 

 

"머리 아파요."

 

 

 

"너 그거 다 운동을 안 해서 그래."

 

 

 

"집 가서 줄넘기 하려고요."

 

 

 

  누가 듣는다면 코웃음 치고도 남을 대화였지만 둘에게는 괜찮았다. 고통? 그런 건 다 단련하면 끝나는 것이다.

 

 

 

 

 

  잠뜰 경위는 머리가 아팠다. 아니, 배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치통일지도. 따끔거리는 두 눈을 감았다 떼고, 다시 깜빡거리면 눈앞에는 영락없는 전-미스터리 수사반 일동이 앉아있다. 끄응, 고통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자네들이 왜 여기에 있지."

 

 

 

"다시 말씀드려요?"

 

 

 

"에이, 좋으면서 괜히 다시 듣고 싶으니 그러신다."

 

 

 

"안돼. 또 말하면 퇴근 늦어져."

 

 

 

"다시 말해보자면 며칠 전 각별 경위님께서 수사한 사건에서 명광파 족속들의 사건과 유사한 특이점이 발견되어-"

 

 

 

  크악, 늦어진다! 경위님 그러는 게 더 늦어질걸요. 수현 경위가 예사롭지 않게 생긴 찻잔을 들어 우아하게 마셨다. 저런 찻잔은 도대체 어디서 구하는 거지. 잠뜰의 옛날 본가에서 찾을 수 없는 기묘한 푸른빛의 도자기였다. 아니, 이런 점은 차지하고 나서도, 방금 전으로 다시 돌아가 보도록 하자. 잠뜰은 이상한 연락을 받았다. 수신자나 내용이 이상한 건 아니고(생각해 보니 둘 다 이상한 게 맞다.) 수현 경위가 보낸 전화였다. 오랜만이네요, 경위님 뭐 이런 여상한 문구 따윈 없는, 퇴근 후 8시까지 제집으로 오세요. 다들 있어요. '집'이 어딘지 '다들'은 누군지, 어이없지만 잠뜰 경위는 둘 다 안다. 수현 경위 요즘은 잘 지내지? 그런 답변도 당연히 없었다.

 

 

 

"아냐, 그냥 해본 말이었어. 계속하지?"

 

 

 

"해외까지 뻗쳤던데요. 주로 우리나라에서 배로 갈 수 있는 가까운 아시아 지역으로요."

 

 

 

  주로 사기 같이 가벼운 행각이지만. 비교적 가벼운 파일들을 사악, 사악 소리 내며 넘기던 수경위가 여러 개의 두껍고 뚱뚱한 파일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것들을 곁눈질했다. 저걸 다 모으셨어요? 왜 언질도 안 해주셨대. 여러모로 가운데 조각이 부족 해서 말이야. 버리거나 빼 둔 종이들만 모아둔 파일도 있는데 새로운 정보를 얻었으니 교차 확인해서 더 추가할 거야. 덕경장이 와우. 짧게 탄식 같은 감탄을 표했다. 저한테 시키실 건 아니죠? 덕개야! 저런 건 막내인 네가 해야지! 안 나올줄 알았으나 익숙한 논조의 문장이 튀어나왔다. 실실거리는 웃음소리까지 여러모로 과거와 같았다.

 

 

 

  잠경위는 이마 주변을 매만지면서 동료들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어딘가 다들 기대하고 있는 듯한 표정. 악독한 범죄가 나라를 넘어서 다른 나라까지 수마가 닿았다는데 이 표정은 다들 뭐란 말인가? 잠경위는 손을 내려 입 주위를 매만졌다. 사실 그러한 감정이 맴도는 건 잠뜰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같이 할 수 있다-

 

 

 

"경위님?"

 

 

 

"…"

 

 

 

"왜요?"

 

 

 

  심각한 범죄인데 우리들이 너무 눈치 없이 좋아하는 티를 냈나? 정답인 것 같아요, 공경사님. 덕개야

그러니까 내가 표정 관리 좀 하랬잖니, 너는 어쩜 이렇게 성장이란 걸 전혀 하지 않았니? 와, 나 진짜.

라경사님 나 말리지 마요. 안 말려. 그런 익숙한 투덕거림이 낮게 깔렸다. 잠경위님. 진중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각경위와 수경위가 눈에 보인다. 고민하고 계십니까? 네. 답지 않게 존댓말이었다. 약간 굳은

표정이었던 각경위가 그 대답에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걱정 마세요. 일단 저질러버리면 서장님도 허락하실걸요. 빽 있잖습니까? 난 빽이 없다니까... 수현 경위가 옆에서 살포시 웃었다. 오히려 빽은 저 사람이... 결심한 잠경위가 일어섰다. 5명의 시선이 따라 붙는다.

 

 

 

"뭐하나? 수사 신청서 제출 해야지?"

 

 

 

  사실 오래 생각해둔 결말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거의 전부가 채워진 퍼즐은 사실 귀퉁이 몇 조각이 없다. 해독되지 않은 문장이나 절대로 열리지 않을 자물쇠. 박멸. ...이라는 단어는 한낱 날벌레들에게도 힘든 일이라는 걸 알면서 잠뜰은 그런 행위, 그런 세계, 그런 정의를 꿈꾼다. 내 동료들이 이렇게 기특하게 자료들도 모아오고 회의 소집도 했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어? 그러고 보니 내가 소집하지 않는 회의는 또 처음인가.

 

 

 

  고통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모든 것은 맺어지지 않는 끝으로부터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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