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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편지일까, 혹은 나의 회고록일까.
아니…, 아니다.
그저 혁명을 다룬 연극의 뒷이야기 정도가 좋겠다. 본래의 역사에는 차마 드러내지 못할, 웅장한
이야기 뒤에 소박하게 존재했던 그 시간을 칭하기에 과하지 않을 단어다. 분명 박동하였으나 수면 위로 드러나서는 안 될 기억. 우리의 우정은 그토록 고요히 정의될 뿐이다.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총성이 울렸다. 나는 네 맥을 끊어놓은 마지막 격발의 순간을 알 수는
없었다. 하나 내 귀에는 환청처럼 폭발음이 맴돌았다. 네가 자리했을 곳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나는
네가 살아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버린 사람처럼 행동했다. 탕, 고막을 꿰뚫고 지나간 총알의 여파로 진한 이명이 두통을 유발했고, 깊은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단지 지금이라도 그곳으로 향해야만 너를 배웅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눈도 감지 못하고 망연히 네 자리를 지키고 있는 너를 목도한 순간, 이 상황이 내가 견딜 수 있는 수치를 아득히 넘어섰음을 직감했다. 네가 평안히 잠들 수 있도록 눈을 감겨주었던 것만은 내게
유일하게 남은 의지였다.
웃으며 배웅할 자신이 없어 나는 달렸다. 별장 앞에 말을 매어두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하염없이 나아갔다. 싱그럽게 물들었던 새파란 정원에 돋아난 것은 풀꽃이 아닌 불꽃이었고, 내 시야는 오롯이 붉게 일렁일 뿐이었다. 눈을 감고 늘어진 네 시신을 등지고 달아나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 어딘가
우리의 이야기가 울려 퍼지는 극장이 있다면, 그 극의 제목은 혁명이 되리라, 하고. 행복한 사람들 사이에서 굳이 진지한 연극을 상연하려 들까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수많은 시간을 넘어서라도 만약
존재한다면.
우리의 인연은 그런 이름의 이야기로 정의된다. 본디 역사는 승리한 자의 입장을 노래하고, 그날의
전투는 민중의 승리로 끝났으므로.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이름을 붙이길 원했다. 격변의 시간에 휩쓸려 거세게 조각난 건 우리였음에도, 혁명이라는 극 속에는 너와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마지막 왕자와 새 시대의 혁명군만이 존재했던 거대한 흐름을 후대는 기억하고 공부하겠지.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나와 뜻을 함께한 동료들은 너와 나의 친분을 몰랐다. 차마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나날이었기에. 혁명군과 왕자가 친구라니, 누가 그걸 믿어주겠어. 또한, 꿈을 닮았지만
흐릿하지는 않았던 놀음에 함께했던 사람은 죄다 죽었기 때문에. 너와 네 호위 기사는 과연 같은 곳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까. 궁금증에 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살아남았다. 소리를 입고서 실체화되더라도 쉬이 믿음을 사지 못할 기억을 짊어진 채 나는 내일을 향해 걸어가겠지. 그리고 언젠가, 내게 허락된 시간마저 생을 다하는 순간이 오면 정말 그 순간들은 사라지게 되는 거야….
너는 모르겠지만, 네가 마지막 숨을 내뱉었던 그곳은 망해버린 왕가를 전시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혁명을 이끌었던 자들이 내릴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 결정을 이해했다. 마지막 왕족의 삶이 끊긴 그 장소는 곧 왕국의 멸망과 공화국의 등장을 상징하는 곳이 될 테니까.
탄생과 소멸이 교차한 지점에, 채 완성되지 못한 네 초상화를 걸었다.
전시관에 가만히 서 네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내가 이상한 것처럼 느껴졌다. 가벼운 분위기가 가득한 장소에서 나 홀로만 무거운 감정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이미 몰락해 버린 왕가의 망령을 놓지 못하는 내가 아둔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전시관을 떠났다.
나는, 나의 동료들은 국민을 원했고 너는 백성을 원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는
환상을 믿고서 엉망이 되어버린 땅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너도, 나도 알았다. 만일 우리가 혁명군과 왕자라는 자아를 벗어 던지고 그저 너와 나로만 존재할 수 있는 땅으로 떠났다면. 어딘가의 우리에게 그런 미래가 존재한다면 결코 막연히 행복할 수는 없었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 이후 쉽사리 총을 잡을 수 없었다. 그날의 총성은 환희의 축포를 닮아있었지만 내게는 모순의 극치처럼 다가왔다. 내가 지키고 싶었던 것들은 나의 대의를 위해 희생해야만 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네가 사랑한 것들만이 남았다. 참 이상한 일이지. 이제는 국민이 되어버린 너의 백성들은 그들이 줄곧 그러했던 것처럼 제 자리를 지키며 살아갈 테다. 이런 이야기로 네 마음을 편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총을 쥐지 못하는 나는 또다시 다른 길을 찾아 헤맸다. 어쨌거나 나는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그렇게
흐르고 또 흘러 물줄기가 거세게 쏟아지는 폭포 인근의 시골에 다다르고 나서야 나는, 그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 공간이 그저 마음에 들었다.
자그마한 유랑극단의 의뢰를 몇 번 맡아 해결하기도 했다. 왕정이 붕괴하고 덩달아 자유로운 분위기를 띠는 시대였다. 무대의 뒤편에서 우스꽝스러운 희극이 펼쳐지는 광경을 보았다. 아름답고 찬란한
사랑에 빠진 연기를 하는 여인의 치마 뒷부분에는 넉넉한 수입을 챙길 수 없어 몇 번이나 고쳐 기워놓은 자국이 만연했다. 저 앞에서 연극을 관람하고 있는 관객들은 열띤 사랑을 하는 연인들만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양손의 검지와 엄지를 펼쳐 사각형 모양으로 맞대고 세상을 바라보는
일과 유사하다. 무의식적으로 사각형 안의 풍경에만 시선이 쏠리고, 그 외의 부분에는 눈길이 닿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글쎄. 이런 것들을 이해하게 된 속이 그렇게 시끄럽지만은 않다. 구태여 내가 일감으로 극단의 의뢰를 택한 것에는 연극을 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과장된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람들의
이면에는 어떤 삶이 자리할까 싶은 궁금증이 일어서. 그래. 어쩌면 공감이 갔을지도 모르겠다.
유명하지 않은 유랑극단의, 이야기 속 인물의 껍질을 벗어던진 배우는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래도 그들의 뒷이야기를 기억해 줄 사람 하나쯤은 있으면 좋지 않겠나, 그런 욕심이 들었다. 내가 저 극을 이끄는 사람이 된다면 나는 그들의 손을 하나하나 쥐고 끌어내 본연의 모습으로 웃는 얼굴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 또한.
그렇게, 또 한번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어렵고 고되겠지만, 나는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 길을 따라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품고만 있던 뒷이야기를 미친 척, 모른 척 섞어 풀어내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지. 기억 속에서 잊힌 왕자와 이름 모를 평민의 이야기를.
From. 친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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