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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첫날, 잠뜰이 화를 냈다.
그날은 평범하게 공룡이 장난을 친 날이자, 평범하지 않게 잠뜰이 화를 낸 날이었다. 평범치 않은 일에 모두가 깜짝 놀라 얼어붙었다.
사실 잠뜰이 화를 낼만큼 그리 심한 장난은 아니었다. 방금 공룡이 했던 짓이래 봐야 종종 해대던 재미없는 아재 개그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평소의 잠뜰이라는 애는 거기에 헛웃음까지 지어주는 성격 둥글둥글한 애였고.
다만 오늘은 시기가 조금 나빴을 뿐이다. 주변에서 그 애가 마냥 둥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던 탓에 밤송이가 되었을 뿐이다.
"미안해요. 선배한테 화풀이해서."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내가 너무 재미없는 드립쳤다."
둘 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사과는 빨랐다.
"맞아 공룡이 잘못했어. 너 잠뜰이 지금 수행평가 준비 중인 거 몰라?"
"나도 알아! 잠뜰이 내일 2교시 수행 맞지?"
"누가 들으면 선배들은 수행 없는 줄 알겠어요?"
"우린 없는데? 중간고사 다음 주에 바로 다 했어."
"백지 제출하고 혼난 것도 한 걸로 친다면 말이지."
"야, 그건 너도잖아."
그것참... 정말로 안 놀라운 소식이네. 공룡과 덕개가 2학년 전교 꼴등과 바로 그 앞 등수를 두고 다툰다는 건 잠뜰 뿐만 아니라 전교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선배들이야 그렇다 치고, 라더 너는 준비 안 해?"
잠뜰과 같은 학년일 뿐만 아니라 같은 반이기까지 한 라더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응."
"맙소사, 넌 믿었는데."
"야, 얘가 좀 얌전해 보이긴 해도 우리 동생이거든? 1학년 전교 꼴등의 영광은 라더 거야."
"음음. 1학년에는 라더의 적수가 없을걸."
"와 진짜...."
저 정도의 당당함이라니.
어이가 없어 절로 웃음이 나왔다. 가벼운 소란이 있긴 했지만, 이미 서로 사과한 데다가 웃음까지 터져버렸으니. 잠뜰은 한바탕 웃고는 다시 쓰던 글로 고개를 돌렸다. 학교가 끝나기 전에는 완성해야 했다.
"라더야, 너네 수행평가가 영어로 글 쓰는 거야? 와 진짜 어떡하지."
"백지 낼 거야."
"야 그러면 덕개한테 부탁해 봐. 적당히 안 혼나고 넘어가게 해 줄걸?"
"뭐래. 누가 해준대? 그냥 선생님한테 혼나. 어차피 라더네 영어 쌤은 수현 쌤이잖아."
"헐, 그랬지? 완전 부럽다."
아 정말 못 참겠다.
"선배, 학생의 본분은 공부 아녜요? 그렇게 아예 던져도 되는 거야?"
"누가 그래? 수현 쌤은 우리한테 건강만 하면 된다고 그랬거든?"
"...우리 아빠가 그랬는데."
"그 말도 맞는 것 같아. 역시 관점은 사람마다 다른 거지."
"추하다 공룡."
공룡의 발 빠른 태세 전환에 엎어져 있던 덕개가 슬쩍 고개를 들고 한마디 얹었다. 첫인상은 꽤 시크해보였는데, 보다 보면 은근히 공룡 선배 놀리는 데 진심인 사람이다.
"넌 잠이나 자!"
"시끄러워서 잘 수가 있어야지. 잠뜰이도 할 거 해야 하는데 좀 조용히 해."
"헉, 시끄러웠어?"
"어."
"너 말고 잠뜰이 말이야."
"네 시끄러웠어요. 아주아주 많이."
헙.
공룡이 손을 들어 제 입을 가렸다.
"이제부터 진짜로 말 안 함."
"진짜요?"
"어. 진짜."
"아싸."
덕개는 신나서 제대로 잘 자리를 마련하고-의자를 여러 개 이어붙여서- 누웠다. 공룡이 샐쭉한 눈길로 쳐다봤지만, 알게 뭐람. 진짜로 조용해진 덕분에 오랜만에 제대로 잘 기회를 얻었는데.
공룡이 조용해지고, 덕개가 잠들고, 잠뜰이 제 글에 집중하자 동아리실의 분위기는 금세 가라앉았다. 아무리 세계여행 동아리라고는 해도 여행은 한 달에 두 번뿐이고, 나머지 동아리 시간은 자유시간이다. 그리고 이번 주는 쭉 자유시간이라 평소 같았으면 소란스러웠을 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들이 이렇게 열심히 면학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이번 수행평가에 잠뜰의 동아리 탈퇴가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음, 그러니까... 잠뜰이 지난 중간고사에서 전교 일등을 하기는 했다. 그걸 축하하기 위해 파티까지 했고. 하지만 잠뜰의 아버지 눈에는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원래 지망했던 명문고등학교가 아니라 공부 못하는 학교로 왔으니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데, 사실 성적포기자 셋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잘 몰랐다. 아무튼 전교 일등 했으면 좋은 거 아냐?
다만 자칫 잘못했다간 잠뜰이 동아리를 바꾸게 될 수도 있다는 건 간결하게 와닿았다. 아버지의 뜻에 따랐다면 진작에 다른 동아리로 옮겼을 것을, 잠뜰의 중간고사 성적이 좋았기에 유지하고 있던 거였으니까.
전에는 덕개 형 능력으로 기억 지우자더니.
그건 그때 얘기고.
라더와 공룡은 평소처럼 말없이 대화를 나눴다.
사실 라더의 눈짓대로 공룡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부인을 동아리에 들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잠뜰이는 이미 우리 동아리의 일원인걸. 그리고 애당초 우리를 찾아낸 건 저쪽이라서 기억을 지우고 인식을 더 어렵게 만들어도 간절함이 있는 한은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
쟤가 우리 동아리 들어온 이유는 해결해주고 보내야지.
어떻게...?
음... 쟤 꿈이...
"비행기였나?"
"네?"
"아니, 아니야."
조그마한 음성이 교실 하나를 가득 채웠다. 공룡이 가장 먼저 고요를 깨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조용히 있기로 한 날이었다. 심지어는 그 말을 한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야 너는 조용히 하겠다는 게 30분을 못 가냐?"
"아이 참, 실수야 실수. 속으로만 생각하다가 그만 입 밖으로 나와버렸네?"
"시끄러우니까 둘 다 밖에 나가서 생각해."
우씨. 보통은 생각까진 못 읽거든?
- 억울하면 손짓발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사생활 침해라니까 그거.
잠시 덕개 들으라고 일부러 속으로 투덜거리던 공룡은 제 막냇동생을 데리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마침 생각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겠다. 나가서 속 편히 얘기나 해야지. 제 동생은 말이 엄청나게 없지만, 그만큼 듣기를 잘하는 애니까.
...아직은 초여름이라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아 교실과 복도의 기온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단지 차이라면, 복도는 해가 들지 않는 방향이라 조금 선선하다는 점. 추위 많이 타는 공룡에게는 약간 서늘한 정도였다.
"라더야, 비행기라는 게 뭘까?"
"...? 비행기가 비행기지."
"으음."
"..."
생각나는 대로 아무거나 내뱉던 공룡은 라더가 제 뒤를 계속 따라오는 걸 확인하며 느긋하게 운동장으로 향했다. 운동장 구석 벤치가 해가 잘 들어서 꽤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 날씨 좋다."
굳이 의자 여러 개를 이어붙일 것도 없이 기다란 벤치에 드러누우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햇볕이 벤치를 데워둔 덕분에 나뭇결은 따스했고, 얼굴에는 적당히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눈이 부시지도 않았다. 여기 이렇게 누워서 하늘만 봐도 좋은데, 다른 애들은 왜 전부 교실 안에 있는 걸까?
...공부라는 게 뭐길래 잠뜰이 같은 애를 괴롭히는 걸까?
잠뜰과 다른 애들을 괴롭히는 게 무언지 아무리 고민해도, 공룡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지, 죽었다 깨어나면 이해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공룡의 몰이해는 그가 연구소에서 자라난 이상자라는 데에서 기인했으니까.
공룡과 그의 동생들은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나이에는 저들이 탈출해낸 연구소의 추적을 피해 숨죽여 사느라, 중학교에 다닐 나이에는 교육과정을 따라갈 수가 없어서. 고등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어서야 그들의 호기심과 초능력을 다루는 기술과 보호자인 수현의 의지가 모두 맞물려 편법으로 간신히 등하교나 하게 되었다. 중학교 교육과정도 따라잡지 못하던 그들은, 자연히 고등학교 교육과정도 따라잡지 못했다. 사실은 공부를 한다는 개념조차도 얄팍해 흥미를 못 붙인 것에 가까웠다.
수현 쌤은 우리보고 늘 건강만 하면 된다고 했어. 평범하지 않은 이런 삶도 있는 거라고.
공룡의 머릿속, 생각의 가지가 끝도 없이 뻗어나갔다.
"라더야, 내가 비행기의 성질에 대해서 조금 생각을 해봤거든?"
"응."
"그런데 잘 모르겠어."
왜 비행기가 되고 싶어 하는 거야?
"비행기는 이동 수단이잖아. 기계란 말이야. 새도 있는데 왜 굳이 비행기지?"
"..."
그의 평범하지 않음은 늘 이런 곳에서 발목을 잡았다. 제 초능력과 비행기 사이에는 차이점이랄 것이 딱히 없다. 다만 비행기는 비싸고, 오래 걸리며, 하늘을 난다는 것이 그나마의 차이점이었다.
"...하늘을 날고 싶은 거 아냐?"
"그런가? 그런 건 내가 초능력으로 해 줄 수 있는데."
"그건 추락이야."
공룡은 제 앞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그거나 그거나. 아무튼 하늘 위로 띄워 주면 그게 나는 거 아냐? 뭐가 다른 건데!
"잠뜰이 그냥 졸업할 때까지 쭉 우리 동아리에 있어야 할 듯?"
"..."
"잠뜰이 꿈은 내가 못 이뤄줄 것 같아."
가만히 옆에 앉아있던 라더의 무표정이 약간쯤 구겨졌다. 웃음인지 황당함인지, 치닫는 감정을 참는 것이다. 공룡 본인도 제가 이렇게 만난 지 얼마 안 된 남 인생에 관여하는 게 조금 웃기다는 건 인지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주변 사람이 행복했으면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모두의 해피 엔딩이라는 건, 너무 어려운 것 같아."
창밖에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퍼져 와닿았다. 제 형제의 목소리는 나무에 닿고, 새에게 닿고, 꽃에 닿았다. 바깥에서는 말을 조심하라고 내가 그렇게 당부했는데. 이 인간이 정말.
덕개는 이마를 짚으며 온 곳에 남은 공룡의 목소리를 지웠다. 정확히는 인지 왜곡 필터를 덧씌운 것에 가깝다. 저들을 쫓는 자들은 초능력을 연구하는 자들이었고, 그 치들이 저 같이 생각을 읽는 사람을 만들거나 동물이나 식물과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이 이상 인지 왜곡을 거는 건 곤란해. 그러니까... 내가 해야 하는 건.
"잠뜰아, 잠깐 쉴 겸 좀 걸을래?"
"선배가요? 쉴 틈나면 자려고 하는 사람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먼저 산책을 권하는 거지.
하며 의심의 눈초리로 저를 바라보는 게 꽤나 제 인생을 돌아보게 만들어서, 덕개는 쓰게 웃으며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공룡이 여기저기에 나 초능력자요 말하는 것 같아서 좀 주의 주려고."
"어휴. 그런 거라면야, 같이 가요."
정확히 어떤 사정인지는 잘 몰랐지만, 대강의 눈치로도 잠뜰은 그들이 초능력을 숨겨야 한다는 건
알았다.
공룡과 라더가 있는 장소로 향하는 길에는, 그들의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나무와 풀과 개미가 있었다. 원래부터 여로 고등학교에는 세계여행 동아리의 존재감과 이질감을 흐리는 강한 암시가 걸려있긴 했지만, 얼마 전에 수상한 사람을 만난 일도 있으니까. 지금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때다.
"잠뜰아, 너는 꿈이라는 게 뭐라고 생각해?"
"선배 혹시 낮잠 자다 꿈꿨어요?"
"아니, 그 꿈 말고 다른 꿈."
덕개는 제 언변의 부족함이 내심 아쉬웠다. 덕개는 공룡과 달랐다. 일반인이 저희와 얽혀서는 좋은 일이 있을 리 없다는 걸 마음 깊이 이해하고 있었고, 그러므로 어서 이 애의 꿈을 해결해줘야 한다는 걸 알았다. 정체불명의 괴한까지 나타난 마당에 천천히 알아갈 시간은 없으니. 하루빨리 이 애의 꿈을 알아내야 했다.
"꿈이라는 건... 바라는 것? 되고 싶은 것? 뭐 그런 거 아녜요?"
"네 꿈은 뭔데?"
"...의사요."
그런 건 분명 아닐 텐데.
우리 동아리를 발견한 사람치고는 너무 평범하잖아.
"이상하다, 비행기였는데."
"그건 어릴 때잖아요!"
"어릴 때나 지금이나, 어릴 때는 왜 비행기가 되고 싶었는데?"
"...그냥 어린 마음에 멋져 보였나 보죠."
"으음... 알겠어."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간 줄로 알고 안심했는데, 바로 옆에서 공룡이 튀어나왔을 때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공룡의 말을 듣고는, 더더욱.
"덕개야, 너 그거 사생활 침해라니까?"
"......자세히는 안 읽었어."
"선배 설마 제 생각 읽었어요?"
질문을 받으면 사람은 보통 무심결에 대답을 떠올린다. 그 말은, 잠뜰도 속으로 대답을 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걸 읽었다니. 잠뜰은 삽시간에 제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그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더라?
"형, 순간이동은 왜-"
"라더까지 찾았으면 이만 들어가요!"
아, 진짜. 안 그래도 기분 복잡한데!
그 길로 잠뜰은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동아리 시간도 끝이 났던 데다, 동아리 시간이 가장 마지막 교시였기 때문이다. 비록 집에 가자마자 마주친 아버지에게서 오늘은 독서실에 가보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지만, 수행평가를 마무리하려면 집이 편하다는 핑계를 대고 집에 머무름으로써 마음껏 이불을 걷어찰 시간을 얻었다.
제가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이건 솔직히 덕개 선배가 나빴지!-부끄러웠다. 어릴 적의 허황된 꿈을 아직 못 놓은 것이라거나, 거기에 타당한 이유를 붙이려 들었던 게, 너무 부끄러워서 이불을 걷어차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다.
아 정말, 당장 내일부터 학교 어떻게 다니지?
똑똑-
"아빠, 저 수행평가 준비 중이에요!"
"잠뜰아 피씨방 갈래?"
이건 분명 공룡의 목소리였다. 잠뜰은 그만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오? 뭐야? 웬일로 열어줘?"
"오랜만에 왔길래요."
공룡은 눈치가 빨라서, 제 마음이 싱숭생숭한 날에는 종종 찾아왔다. 그래서 잠뜰은 선뜻 창을
열어주었다.
"피씨방 갈래?"
"피씨방 말고 다른 곳 없어요?"
"음... 지구 반대편 갈래?"
"이게 진짜 무슨 멘트지."
청량한 웃음과 함께 도착한 곳은, 은방울 꽃밭이었다. 잠뜰 자신과 공룡, 덕개, 라더, 수현, 모두가 있는.
이건...
"덕개가 마음대로 생각을 읽은 걸 사과하고 싶대."
방금까지만 해도 이불에 구멍이 날 정도로 세게 걷어차고 있었는데, 한밤중에 이렇게 꽃밭에서 마주하고 나니까. 이제는 아무래도 괜찮았다.
"...잠뜰아 미안해, 앞으로는 마음대로 네 생각을 읽지 않을게."
"괜찮아요."
잠뜰은 이 꽃의 꽃말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용서했다. 이 꽃의 꽃말은, 틀림없이-
"이 장소, 덕개 선배가 골랐죠?"
"응."
"뭐야, 잠뜰이 너 어떻게 알았어?"
"그야, 여기에 꽃말 챙길 정도로 섬세한 사람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사과하고 싶었던 사람이 열심히 알아봤겠죠."
틀림없이 행복해집니다.
은방울꽃 특유의 푸릇한 내음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주었다. 그 좋은 향기를 말없이 한껏 즐겼지만, 그 누구도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진짜로 뭘 숨기는 데에 영 소질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데도 못 꺼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틀림없이 나를 행복하게 해줄, 그런 말이.
"자, 그럼 본론이나 말씀해주시죠?"
서로에게 말을 떠넘기던 삼 형제는, 결국엔 모두를 여기까지 데려온 사람을 떠밀었다. 첫째의 설움을 짊어진 공룡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고, 장소 오케이, 분위기 오케이. 서두만 잘 띄우면 돼.
"우리 잠뜰인 눈치도 좋지..."
"저 집 가서 수행 준비해야 하거든요? 얼른 말해봐요."
어? 잠깐만, 수행 망하면 얘 동아리 탈퇴인데?
"우리가 네 꿈을 이뤄주겠다고 나서도 될까?"
급히 튀어나온 맥락 없는 말에 덕개와 라더는 모두 이마를 짚었고, 공룡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수현 선생님은 그저 허허 웃었고, 잠뜰은 폭소했다.
"공룡 선배, 제 생각 읽혔던 건 그냥 묻히겠는데요?"
"으아악! 이러려던 게 아닌데!"
마음의 짐도, 웃음도, 부끄러움도, 모두 도맡아준 것이 기꺼워서 잠뜰은 기꺼이 수락했다. 우리가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남은 날이 더 많으니까!
"좋아요. 앞으로 오늘은 기념일인 거예요. 나랑 공룡 선배가 부끄러웠고, 덕개 선배가 사과했고, 또... 여러분이 내게 약속을 한 기념일."
"그리고 잠뜰이 네가 웃은 기념일."
라더의 말에 잠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애도 이렇게 나서다니. 오늘이 확실히 무슨 날이긴 하구나.
"기념할만한 날이네. 그렇지?"
"그러네요."
모두의 웃음 사이, 그들은 작은 약속을 나눴다.
"우리는 네 꿈을 이뤄주고 싶고, 너에게 해피 엔딩을 주고 싶어. 그러니까, 네 꿈을 말해줘."
"나는 비행기가 되고 싶어요. 새는 안 돼요. 커다란 비행기가 되어서, 제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태우고 함께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싶어요."
우리 모두 함께 행복해지는 거예요.
여름의 첫날,
떨리는 회색 눈동자와 깜장 눈이 마주치고, 감긴 눈이 뜨이고. 렌즈의 초점이 맞아 드는 날은 마침내 찾아왔다. 예전 그 여름의 첫날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만난 오늘은 마치 영화와도 같아서. 모두가 깜짝 놀라 얼어붙어 버렸다.
한동안 서로 쳐다만 보다가 먼저 정적을 깨는 것은, 역시나 이번에도 공룡이었다.
"비행기였나?"
"...네."
언젠가 나누었던 대화가 반복되었다.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명확하게. 확신을 담아서.
"비행기예요!"
말 속에 담긴 단단함은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가시 밤송이가 단단한 열매가 되었다. 곧장 순간 이동해 온 공룡이 가장 먼저,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라더가 그다음, 조금 멀리 있던 덕개가 마지막. 그들은 다 함께 껴안았다. 가운데 잠뜰을 두고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오랜만이야. 비행기야.
"이루어졌어?"
"이루어지는 중이야.“
행복은 엔딩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니까.
Date.06.01.
비행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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