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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지직...
‘회담 결과가 나왔습니다. 정부와 반란군의 내전은 종전이 아닌 휴전을 하기로 결정 되었습니다. 단, 정부의 반란군측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보장을 하기로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욱 중요한 것을 얻어냈습니다. 우리는 살아 남았습니다.’
수명을 다했는지 지직 거리는 잡음만 흘리던 고철 덩어리가, 결국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완전히 꺼진다. 하지만, 그것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래 된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낡아빠진 목소리, 목소리만으로도 지친 기색이 역력한 것이 선명하게 전해져 온다. 그럼에도, 그 피곤한 목소리에 희미하게 묻어서 숨겨지지 않는 기쁨. 우리는 살아 남았습니다, 살아 남았습니다... 마지막 그 말은, 꼭 저주처럼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울려댄다. 그 속에 차마 감춰지지 않은 확실한, 안도와 환희. 라디오를 둘러싼 다섯명의 사람들은 여전히 꼼짝도 않았다. 평소처럼 이 고철! 하며, 라디오를 쳐대는 툴툴 거리는 손길도. 혹여 모를 상황을 위해, 귀를 쫑긋 세우고 주변을 경계하는 날카로움도. 그 무엇도, 그곳에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그대로 시간이 멈춰버린 사람들 마냥. 무표정인채 그대로, 기다란 정적이 가라앉는다. ......하하. 문득, 정적을 깨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온다. 누구에게서 먼져 터져 나왔을지는 모를 일이다, 그것은 맥이 탁- 풀린 사람의 것 같기도 했고. 안도를 닮기도 했으며, 또 무언가의 포기를 담아내고 있었다. 한숨처럼 새어나온 웃음소리는 순식간에 전염 되어 버려서, 그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서 동시에 커다란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희미하게 옅은 숨소리 같은 웃음소리는, 이내 커다란 폭소로 변질되어 버렸다. 나 여기 살아 있다고, 그 웃음소리는 꼭 자신의 생존을 알리는 절박한 울음과도 닮아 있었다. 그와중에도 여전한 무표정이던 잠뜰이 툭, 그때까지 손에 쥐고 있던 스페너를 놓아버렸다. 쨍그랑- 철제가 바닥에 부딪히며 꽤 커다란 소리를 낸다. 이어, 몸에 힘이 완전히 빠져 버린건지 잠뜰이 거의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 앉았다. 그럼에도, 그곳으로 신경을 쏟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각자 제마다의 이유로, 눈물 같은 것 대롱대롱 매달고 있는 이들에겐 더 이상 타인을 신경 쓸 여력 따위 남아 있지 않았다. 느릿하게 굴러가는 회백색 눈동자가 천천히 주변을 훑어본다. 군데군데 구멍 뚫린 벽에서는 차가운 바람이 새어 들어오고, 그를 막기 위해 덧댄 판자더미들은 엉성하기 짝이 없다. 바닥이나, 벽 구석구석에 미처 살피지 못한 총탄의 흔적이나. 칼자국이라거나, 먼지 쌓인 집구석만큼 너덜너덜한 사람들의 모습까지. 한 때는, 꽤 안락한 쉘터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지금와서 살펴보니, 지나치게 낡아빠졌다.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는데, 누구 하나 멀쩡한 사람이 없는데. 두 손에 얼굴 파묻은 잠뜰의 고개가 자동으로 바닥으로 떨궈졌다. 눈가가 뜨거워지고, 당장이라도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하하, 하... 하지만 결국 손틈으로 새어나오는 건 웃음 뿐이었다. 공식적인 휴전 선언이 라디오를 타고 울려퍼졌다. 전쟁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나는, 생존했다.
#00
-시작
일정한 간격으로 덜컹거리는 규칙적인 소음. 사람들의 손 떼 잔뜩 묻어 불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풍경이 빠르게도 변화해 간다. 딱딱하지도, 그렇다고 푹신하지도 않은 의자의 감촉은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 또한, 생경한 것들 뿐이었다. 툭, 창가에 머리 붙이고 나면 덜컹거리는 기차의 흔들림이 그대로 전해져온다. 어쩐지, 시끄럽게 울려대던 마음의 고동이 조금쯤은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회백색 눈동자가
천천히 굴러 바깥의 풍경을 살핀다. 뒤숭숭한 마음과 다르게 하늘은 여전히 새파랗다. 인간의 파괴와 몰락에도 상관없이 자연은 언제나 한결같다. 되려, 전보다 더 풍족해진 것도 같았다. 변한 것은, 인간들의 삶일
뿐이었다.
" 이곳도 몇 년 만인가... "
무너진 건물의 잔해들, 그 사이로 상처투성이의 사람들. 자욱하게 올라오는 먼지 탓에 바로 코앞 조차 구별 할 수 없이 탁했던 공기. 곳곳에서 들려오는 구슬픈 곡소리와, 절망 가득한 비명 소리. 그럼에도, 선뜻 도움을 위해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위로를 건네는 사람도 없었다, 각자의 슬픔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모두 한계였다. 잠뜰 또한 별 다를 바는 없었다. 살고 싶었고, 살아야 했기에. 자존심, 신념. 그런 것들은 총과 칼 앞에서는 전부 보잘것 없는 것이 되기 마련이다. 살기 위해 빼앗고, 살기 위해 타인을 상처 입히고. 그렇게 결국엔 살아 남기까지. 그 어떠한 죄악감도 가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면 자신은 차가운 백골이 되어 지금쯤 땅에 묻히거나 재가 되어 공기를 부유 했을 것이다. 그런 세상이었다, 그곳은. 저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우리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깨끗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설령 작은 악행 하나 저지르지 않았다 해도, 그곳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은 또 다른 죄가 된다.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결국엔 타인의 목숨을 짓밟고 얻어낸 삶이다. 수십, 수백명의 삶을 대신해 살아가고 있는 목숨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삶은 간절했다. 이제와 후회하느냐 묻는다면, 선뜻 아니라고 답할 순 없겠지만. 아마, 자신은 그 당시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행동 할 것이다. 처음으로 사람을 베어내던 순간의 감각, 평생 잊을 수 없을 생명이 사라지는 순간의 표정. 총과 칼로 무장한 사람들은 별로 무섭지 않았다. 정말로, 정말로 무서웠던 것은 그 모든 것들에 점점 익숙해지던 자신이었다. 누군가가 살아 있었을 장소에서도, 그 치열한 삶의 흔적에서도 애도보단 물자를 먼저 찾는 모습. 죄책감을 잃고, 감정을 잃는 사람에게 남은 미래 따위는 없다. 그런식으로 얻어낸 삶이 무언가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리도 없었다. 처음에 살아남고팠던 욕망은 어느새 희미해지고, 이제는 그저 의무 혹은 집착이 되어버렸던 순간. 운 좋게도, 타이밍 맞춰 들려왔던 휴전 선언이 아니었다면. 아마, 자신은 지금쯤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넘어가 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전쟁이 끝난 이후 잠뜰은 도망쳤다.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었다, 자신은 언제나 어려운 것들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이었으니. 속죄를 위한 봉사, 허울 좋은 핑계를 대고 도망치듯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그 모든 것들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감정은 쉽게 전염된다, 절망과 좌절. 온 도시를 진득하게 덮고 있는 회색빛 우울을 도저히 감당 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외면하고, 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쳤던 것이 벌써 몇 년전의 일이다.
생경한 풍경들을 지나면, 차츰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거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몇 년 전, 떠밀리듯 떠날 때만 해도 분명 절망만이 가득한 황폐환 폐허의 모습이었는데. 그 때의 모습들은 전부 꿈이었다는 듯, 그날의 상처들은 그저 희끄무레한 흔적으로만 남아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고작 몇 년 사이에 바뀐 도시의 모습은 정말로 놀라운 것들 뿐이다. 한껏 찌푸리고 서로를 경계하던 사람들은, 편안한 얼굴 하고는 햇볕 아래에 서 있다. 아직 완전히 지어지지 않아 철근이 그대로 드러나는 건물의 모습도, 절망보다는 희망에 가까워 보였다. 총탄과 폭음이 차지했던 거리는, 어느새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죽음만이 존재했던 대지 위로 푸릇푸릇한 새싹이 고개를 들어 올리고, 전쟁 따윈 겪어보지 않았을 어린아이 몇이 그 사이를 신나게도 뛰어 다녔다. 어디로 보나, 지독하게 평화로운 풍경이다.
' 찰칵 '
조금 낡은 카메라 안에 그 평화로운 일상의 모습이 온전하게 담긴다. 처음 기자 일을 시작 했을 때부터, 그 지난한 전쟁의 순간을 거치기까지 함께하고 있는 카메라지만 아직도 아무 문제 없이 쌩쌩하게 돌아간다. 화질이라던가, 기능이라던가 신식 카메라와 비교할 바는 안돼도 고전은 고전만의 맛이 있는 법이다. 잠뜰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간다. 찍힌 사진을 확인해 보니, 불투명한 유리창 탓에 꼭 오래된 구식 필름 영화의 한 장면같은 연출이 됐다. 첫 시작으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진이다. 그때까지도 손에 쥐고 있던 작은 노트를 꺼내든 잠뜰이 천천히 문장을 기록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래, 이곳에 다시 돌아온 이유. 도망치듯 떠났던 이곳에 다시 돌아온 이유는 하나 뿐이었다. 전쟁은 끝이 났다, 공식적인 종전 선언은 아니었지만 잔뜩 상처입은 사람들이 곧장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 일은 없었다. 아마, 앞으로 몇 십년간... 어쩌면 몇 백년간은 안전 할 것이다. 죽음만이 가득했던 세상에는, 생기 넘치는 사람들의 일상이 대신 자리를 잡는다. 그곳에서 그들은, 나는. 여전히 살아가고 있을까, 살아 있는 걸까. 그러니, 이는 그를 위한 또 다른 확인. 새로운 세계에 발맞춰 나아가기 위한 밑거름. 전쟁 그 이후의 삶을 담아낼 하나의 이야기.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 된다.
'나는 생각했다. 비관한 삶, 이런 삶에 무슨 가치가 있을까. '
쉘터
-by 일짱-
#01
-첫 번째 고백
" 여기 쯤이었던 것 같은데... "
작은 화면 속 지도를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듯 응시하던 잠뜰이, 다시 눈앞 현실을 확인한다. 지도로는 확인 할 수 없을 정도로 좁고 기다란 길목길, 벽 곳곳엔 그래비티 아트가 그려져 있고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 사이로 깊게 새겨진 탄의 흔적 같은 것들이 보였다. 경계하듯 뾰족뾰족하게 세워진 팬스나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잔해 더미들. 더불어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분위기까지, 이곳이 바로 차마 숨겨내지 못 한 흉터. 즉, 빛에 의해 감춰진 어둠 속이라는 걸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몇 년만에 방문한 거리는 이전과 거의 동일했다. 이게 대체 어딜봐서 젊음의 거리라는 건지. 허, 잠뜰에게서 비웃음과 닮은 짧은 탄성이 터져 나온다. 벌써 두 번째 방문임에도 영 적응 되지 않는 풍경이었다. 단순히 전쟁의 흔적 탓은 아니었고, 그것보다 더 이전부터 존재했을 우울 탓이다. 땅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침낭, 난장판으로 벽에 새겨진 상흔이나 욕설. 처절한 삶의 흔적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것들은 단순히 전쟁으로 인해 새겨진 상처가 아니다, 어렴풋한 흔적 뿐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거리는 애초부터 젊음과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이곳은 도망자들의 쉘터. 현실로부터 도망친, 갈 곳 없는 어린아이들의 보호소. 그 엇비슷한 역할을 했으리라. 세상은 이토록 빠르게 변화하는데, 이곳만은 꼭 그 순간에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절망, 좌절, 우울, 슬픔. 길 구석구석으로 가득 뻗어 진득하게 눌러붙은 질척한 감정들. 그 사이로 숨어있을 작은 이야기들이, 결국 작다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커져버린 거리를 단단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회백색 눈동자가 천천히 주변 둘러 보며, 더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다다른 걸음은 우뚝, 멈춰 선다. 다른 곳보다 유독 어둡고 깜깜한 공간에, 다 녹슨 철문 하나. 이곳이, 박잠뜰의 첫 번째 목적지였다.
철컥, 문을 열고 안 쪽으로 들어서면 퀴퀴한 냄새가 나는 지하실이 어울릴 것 같은 외관과 다르게, 은은하고 따듯한 노랑빛 조명과 함께 훈훈한 기운이 문 너머에서부터 뿜어져 나왔다. 이 골목길에서 이곳만은 동떨어진 세계를 연출한다. 문 하나를 두고 세계가 갈라진다니, 우스운 감상이었다. 회백색 눈동자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녹슨 철문은 꽤 큰 소리를 냈지만, 안쪽에선 어떠한 사람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탓에 어쩐지 절로 발소리를 죽이게 된 잠뜰이 조심스레 더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면, 어느 순간. 나무 바닥과 구두가 마찰하는 작은 소음 뿐이었던 공간에 희미한 이질감이 섞여 들어왔다. 슥, 슥. 발이 내는 소리와는 확연한 차이가 나는 무언가를 문지르는 듯한 소리, 약하게 맡아지는 물감 냄새. 그 이질감의 근원 쪽으로 다가서면, 헤드셋을 낀 채로 작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캔버스 위로 물감을 쌓아 올리는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이 따듯한 공간에 온전히 녹아들어 있는, 이 화실의 주인. 어지간히 집중한 모양인지, 제가 이렇게 침입했음에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 하는 모습엔 절로 옅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대강, 예상은 했었지만 과하게 무방비한 모습이다. 아무리 더이상 날카로운 경계 따윈 필요없는 세상이라지만, 여전히 흉흉한 세상임은 변하지 않았다. 전쟁으로 인해, 돌아갈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수배를 피해 길거리를 나돌았으며. 온갖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종종 정신이 완전히 나가 무분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그러니, 잠금 장치 설치는 기본 중에 기본이련만. 이 강아지귀의 사내는 잠금 장치는 커녕 제가 바로 옆에 다가설 때까지도,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 하고 있다. 또렷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도저히 캔버스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 모습 가만 응시하던 잠뜰이 느릿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시간은 벌써 8시 18분, 약속 시간은 8시. 더이상 기다려 주기엔 곤란했다.
" 득개씨. "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제야 동그란 머리가 제쪽을 돌아본다. 은은한 조명 받아 평소보다 배로 따듯해 보이는 밀갈색 머리칼이 자연스레 공중에서 나부끼고, 접혀 있던 강아지귀가 쫑긋 거렸다. 감은건지 뜬건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드럽게 접혀 있던 눈꼬리는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리자마자 한결 개구지게 접혀 올라간다. 반가운 기색 역력한 얼굴은 금세 맑은 미소를 띄워냈다.
" 잠뜰씨! "
언제 오셨어요? 오셨으면 말 좀 하시지. 얼른 헤드셋 내린 득개가 손에 들고 있던 붓까지 내려놓자 잠깐 그곳으로 시선 흘긴 잠뜰이 익숙한 듯 고개나 절레 휘젓는다. 까딱, 가벼운 손짓만으로 시계를 가리킨 잠뜰이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약속 시간 다 됐는데도 알아차리지 못 한 건 득개씨 쪽이거든요? 이어, 탁자 쪽으로 걸음을 옮긴 잠뜰이 들고왔던 짐들을 늘어 놓았다. 낡은 구식 카메라, 마찬가지로 손 떼 잔뜩 묻어 낡아빠진 작은 수첩. 그리고, 작은 녹음기 하나. 애당초 챙겨왔던 짐들이 별로 없었던 탓에 정리는 금방이었다. 득개가 그 모습 멀뚱히 응시하고 있으면, 몇 번 가벼운 조작으로 핸드폰 두드리던 잠뜰이 그대로 화면을 들이밀어 온다. 득개씨. 라고 쓰여있는 카톡방에는 아직 미처 지워지지 않은 1표시가 그대로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저는 제대로 도착했다고 연락도 드렸고요. 그제야 득개에게서 머쓱한지 작은 웃음소리가 터져나온다. 죄송해요, 작업에 집중하면 항상 이런다니까요. 볼 몇 번인가 긁적거린 득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
" 물어볼 게, 있다고 하셨죠? "
가족의 정의
pg.9
달칵, 빨간 버튼을 누르자 검은 화면 위로 시간이 깜빡거리며 떠오른다. 녹음기를 한 쪽 구석에 미뤄둔 잠뜰의 시선이 조금 떨어진 찬장 쪽으로 옮겨갔다. 달그락, 드르륵. 기분 좋게 은은한 커피향이 순식간에 따듯한 공간을 가득 채웠다. 찬장에서 작은 머그잔 두 개 꺼내든 득개가 손수 섞은 믹스 커피 세 봉지를 컵 하나에 따른다. 다른 컵 하나에는 적당히 시원한 보리차를 담고, 당연하다는 듯 카페인 3배의 커피를 잠뜰에게로 건네온다.
" 믹스커피는, 무조건 3봉지. 맞죠? "
개구지게 웃어보인 득개가 잠뜰의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홀짝, 득개가 건넨 커피 한 모금 마신 잠뜰의 눈가가 자연스레 찌푸려진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커피 하나는 정말 드럽게도 못 탔다. 어떻게 완제품인 믹스 커피를 그저 물에 섞는 행위를 하는데도, 이토록 맹물 맛 밖에 안 느껴진단 말인가. 그런 잠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 몫의 보리차 한 번 홀짝거린 득개가 둥그런 원형 탁상 위로 둥그런 머그잔을 내려놓는다. 탁, 마치 그것이 신호탄인냥 새까만 커피물 바라보던 잠뜰의 회백색 눈동자가 데구르 굴러갔다.
" 의외네요, 잠뜰씨가 먼저 저랑 만나자고 해주시다니. "
한껏 장난스러운 목소리에도 딱딱하게 굳은 잠뜰의 표정은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무슨 변덕인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며 종적을 감출 땐 언제고 이렇게 죽을상이 되어 돌아 온 것인지. 사람의 속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작은 웃음 같은 한숨 내쉰 득개가 탁자 끝자락에 올려져 있던 소형 라디오를 만지작 거린다.
" 잠뜰씨, 발라드 좋아하세요? "
뭐, 그럭저럭... 잠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옅은 웃음 지은 득개가 소형 라디오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조금 지직거리는 잡음이 섞여 들리나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잔잔한 곡조의 멜로디가 흘러 나오기 시작한다. 그 위로 얹혀지는 익숙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도. 이번에, 새로 녹음한 곡이거든요. 덧붙이듯 설명하는 목소리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목소리 또한 지나치게 익숙했는데, 정확히 어디서 들었을지는 모를 노릇이었다. 듣기 좋은 미성에 조금쯤 찌푸려져 있던 잠뜰의 미간이 차츰 풀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톡톡, 일정한 박자로 책상 두드리던 잠뜰의 손가락이 서서히 느려진다. 한결 편안한 미소를 띄운 여전히 어리숙한 사내. 회백색 눈동자가 그것을 가만 응시했다.
예전에 그 양아치스러웠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문득 보여지는 습관 속에 거의 희끄무레한 흔적으로만 남아있는 불량하고 장난스러운 태도를 제외하면 득개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설마하니 정말로 화실을 운영하고 있을진 상상도 못 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이런 거리 속에서 화실이라니. 손님 하나 없이 텅텅 빈 내부도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날카롭게 세워져 경계와 빈정거림 대신 그 위로 덧씌워진, 다정하고 부드러운 미소. 그렇기에, 잠뜰은 새삼스레 득개에게서 이질감을 느낀다. 고향으로 떠나기 직전 함께했던 동료들 하나하나와 꽤 긴 대화를 나눴었다. 커다란 위기를 함께 이겨낸 사람들끼리는 특유의 진득한 유대감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목숨을 건져낸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 탓이었을지, 덕분이었을지. 잠뜰은 득개의 꽤 깊은 속마음까지 들을 수 있었다. 솔직히, 듣고 자시고 그 당시 득개는 한 눈에 보기에도 꽤 불완전한 상태였다. 진득하게 눌러붙은 죄책감과 죄악감. 가족을 잃었다는 슬픔, 그와 더불어 지키지 못 했다는 좌절감. 세상에서 잊혔다해도 스스로마져 잊을 수는 없었다. 죽음 앞에선 누구라도 처절하고 악독해지는 법이다. 살아남기 위해 행했던 일들, 살아남고자 움직였던 모든 순간들. 잠뜰은 득개의 행동에 제멋대로 용서를 붙일만큼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하 감옥에 갇혔던 사람들을 구했던 득개가 원체 악독한 사람은 아닐 것이란 확신은 가질 수 있었다. 애당초 말이다, 세상 어떤 강도가 그깟 협박에 쫄겠는가. 득개는, 악한 짓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끝난 이후 득개는 종종 악몽에 시달리곤 했다. 차마 떨쳐내지 못 한 죄악감 탓에 끙끙 거리는 모습이 퍽 안쓰러워 옆에서 등을 두드려줬던 게 불과 몇 년 전의 일이었는데. 지금 제 눈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선 그때의 기색을 조금도 엿볼 수 없었다. 그때의 득개가 진짜일지, 아니면 지금의 득개가 진짜일지. 사실상, 그건 그닥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달라진 득개, 그렇다면 그에게 던져질 질문은 하나 뿐이었다. 있죠, 득개씨는...
" 지금 삶에 만족 하시나요? "
깜빡, 놀란 듯 조금 동그랗게 확장 된 눈을 몇 번인가 끔뻑거리던 득개가 이내 바람 빠지듯 옅은 웃음 소리를 터트렸다. 되게 어려운 질문을 하시네요...... 기다란 손가락이 느릿하게 머그잔의 손잡이를 쓸어내린다. 데룩데룩, 굴러가는 시선은 종지에 한 곳으로 고정된다. 잔잔하게 깔리는 음악 속 목소리는 어느새 끝에 다다랐는지 노래라기보단, 속삭임에 가깝게 들렸다.
" 잠뜰씨, 제가 저희 집안에 대해 자세히 얘기한 적은 없었죠? "
한결같이 득개의 얼굴에 시선 고정하고 있던 잠뜰은, 그 순간 스치듯 떠오르는 묘한 감정들을 어렵지 않게 캐치 할 수 있었다. 잠뜰은 아무 대답 없이 고개만을 끄덕였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는지 조금 쓰게 웃은 득개가 라디오에 뒷편으로 손을 뻗는다. 달칵, 무언가 부닥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작은 크기의 액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매일 관리 했는지 액자의 유리에는 먼지 하나 없이 뽀얗다. 라디오 뒤편에 숨겨둔 것을 감안하면 영 모순적인 장면이다. 이어, 사진 속 담겨 있는 사람의 얼굴 알아 본 잠뜰은 곧장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릴 수 밖에 없었다. 전쟁 이후, 어둠의 뒤편 아주 깊숙한 곳에 묻어놔 이제는 하얀 먼지 뽀얗게 쌓였을 그 이름. 잠뜰이 부단히도 외면했던 것 중, 하나. ...덕개씨, 여전히 조금은 씁쓸한 웃음 띄운 득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실진 모르겠지만,
" 여긴 원래 덕개의 화실이었거든요. "
지금은 그걸 제가 이어 받은거죠. 여전히 얼떨떨한 잠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 득개가 느릿하게 액자를 쓸어내린다. 사실, 어렴풋이 예상은 했었다. 득개와의 약속 장소가 이 젊음의 거리로 잡힌 순간부터, 덕개의 영향일 것이라고. 그런데, 설마하니 득개 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낼 줄이야. 분명,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득개는 덕개의 이야기를 꺼내기만 해도 심각한 불안 증세를 보이곤 했다. 평소였다면, 장난스레 두어마디 덧붙였을 사람들도 그럴 때에는 침묵을 유지했다. 그곳에서 득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 할 사람은 없었으니까. 전쟁 중에 누군가의 죽음은, 숨 쉬듯 당연한 것이었다. 쉘터 속 그 누구도,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지 못 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가족을 잃는 슬픔에 익숙해 지는 것은 역시 무리다. 그렇기에, 쉘터 내에서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는 건 불문율이었다. 짙은 회백색 눈동자가 빠르게 상대의 안색을 살핀다, 조금 씁쓸해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 아마, 이곳은 그녀석의 쉘터였을 거예요. "
영 뜬금없는 중얼거림에 잠뜰이 느릿하게 두 눈을 끔뻑인다. 득개는 아주 천천히 마음 속 깊이 새겨져 있던 상처를 꺼내든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쟁 전에도 저희 집안의 형편은 그렇게 좋지 못 했어요. 그러니, 음악과 예술 하겠답시고 나섰던 동생의 대한 지원은 당연히 하나도 없었고요. 저는, 형이 되어서는 그런 녀석이 바보 같다고 비웃기나 했었죠. 톡톡, 책상을 몇 번인가 두들기던 득개의 손가락이 일순 멈춰 선다. 덕개는, 그 녀석은 적어도 나처럼은 안 살려고 부단히도 노력했어요. 삐뚫어질 대로 삐뚫어져서, 제멋대로 나가는 저처럼은 안 살려고요. 막힘없이 흘러 나오는 이야기, 기자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맥락 없이 붕 뜬 듯한 이 이야기는, 분명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일 거라고. 자세 똑바로 고쳐 앉은 잠뜰이 기자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득개는 여전히 액자 위로 시선을 고정한 채다.
" 저, 학생 땐 꽤 양아치였거든요. "
툭하면 학교를 빠지고, 공부는 커녕 패싸움이나 안 하고 다니면 다행인 수준이었죠. 집안에선 그런 저를 딱히 신경 쓰지 않았고요. 저한테도 가족 같은 건 그렇게 의미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편하다고 생각했죠. 단어뿐인 관계, 법적으로 묶였을 뿐인 사이. 그런데, 덕개. 그 녀석은 매번... 매번, 제 잘못에 대신 고개를 숙이고 다니더라고요. 바보같았어요, 딱히 달갑거나 고맙지도 않았고요. 지 몸이나 잘 챙기지, 왜 저렇게 미련하게 구는건가. 이해하기 어려웠죠. 그 녀석, 태어날 때부터 몸도 약했거든요. 그래서, 한 번은. 왜 그렇게 멍청하게 구냐고, 크게 화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걔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득개의 고개가 천천히 들어 올려지고 잠뜰과 시선을 맞춰온다. 잠뜰은 느릿하게 휘젓는 고개로 대답을 대신했다.
" ...가족, 이니까. "
가족이니까, 그게 당연한 거라며 웃더라고요. 덕개는 예전부터 그런 쓸데없는 것들에 목맸거든요. 꿈, 낭만. 저희 형편으론 가당치도 않은 것들 쫓겠다며 친구들과 꿈 이루겠다며. 결국 집을 나서기까지 했을 땐, 솔직히 몇 달만에 포기하고 돌아 올 거라고 생각해서 비웃었어요. 당연하잖아요? 걔는, 꼭 삶의 차가운 현실 같은 건 맛보지 못 한 것처럼 굴었거든요. 절망, 좌절, 실패, 우울. 그 모든 것들이 없는 것처럼 굴었어요. 그래서, 저도 당연히 그런 줄 알았고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덕개는 몇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때서야, 저도 깨달았죠. 덕개는 저와 같은 환경에 살았는데, 삶의 어두운 뒤편 같은 걸 눈치채지 못 했을 리 없다고. 마주하지 않았을 리 없다는 걸, 그럼에도 희망이나 꿈 같은 걸 포기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걸. 어쩌면, 그 녀석의 평생은. 매일은, 지지 않기 위한 전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 미련하다고 생각하셨죠? "
또 다시 전해지는 시선, 물음. 의미 파악하지 못 한 잠뜰이 고요하게 시선만 맞추면, 또 다시 느릿한 목소리가 말을 이어갔다. 전쟁 중에 음악이니, 예술이니... 꿈이니. 바보 같은 이야기죠, 저도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만. 아마, 그게 그녀석 나름대로의 생존 방식 이었을 거예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 꿈을, 미래를 잊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나아가며 살아가기 위해서. 그제야 잠뜰은, 그 질문이 덕개에 대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에 대해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도 없었다. 덕개의 대해 알고 지낸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아주 짧은 시간 그것도 전쟁 중 스치는 인연에 그 사람을 속속들이 파악하기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확실하게 대답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실. 덕개의 노랫소리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만들어 주곤 했다.
" ...덕개씨의 음악은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 줘요. "
솔직히, 처음에 바보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전쟁 중에 음악 같은 건 전부 쓸데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해맑은 노랫소리를 듣다 보면 신기하게 날 서 있던 감정이 차분해져요. 그래서,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조금 놀란 듯 두 눈 둥그렇게 떴던 득개가 결국 작은 웃음 소리를 흘린다.
" 잠뜰씨, 수현씨랑 똑같이 이야기한 거 아세요? "
" 수현씨요? "
득개의 얼굴 위로 은은한 웃음소리가 떠오른다. 어느새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힌 컵 표면에서 또륵, 방울 하나가 떨어진다. 솔직히, 처음 휴전 선언이 들려왔을 때 제 꼴이 말이 아니었잖아요. 일상으로 돌아가는 건 무리일 거라고 생각했죠. 애당초, 그전에도 멀쩡한 일상이란 건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요. 돌아갈 곳도, 나아갈 길도. 이 목숨을 부지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왜 살아남았을까, 차라리 내 동생이었다면. 덕개였다면, 달랐을 텐데. 그런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죠. 득개가 천천히 화실의 풍경을 둘러본다. 따듯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은은한 노랑빛 조명, 언제나 후끈하게 열 올라 있는 훈훈한 공기. 곳곳에 진득하게 베여 있는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와 그 틈으로 섞여드는 물감의 냄새.
" 그 때, 이곳을 소개해 준 게 수현씨예요. "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덕개의 얼굴을 봤어요. 액자 속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득개가 한 번 더, 느린 손길로 액자를 쓸어내린다. 잠뜰이 그 모습을 잠잠코 응시했다. 제가, 덕개의 장례식에도 묘지에도 찾아가지 않았잖아요. 그랬더니, 수현씨가 방금 잠뜰씨가 했던 말을 똑같이 하셨어요. 불어오던 바람, 흩날리는 푸석푸석한 머리칼. 생판 남의 죽음이 뭐 그렇게도 슬픈건지, 울은 흔적이 물씬 드러나 빨갛게 짓눌린 눈가. 그럼에도, 또렷한 주홍빛 눈동자.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말고 만나러 가 보라고. 끝까지 싫다고 하는 제 손을, 억지로 끌고 이곳까지 데려왔죠. 솔직히, 처음 감상은 덕개가 불쌍하다고 생각했어요. 집 떠나서 잘 살겠거니, 어렴풋이 생각했는데. 실제론 이런 더러운 뒷골목에서 전전하고 있었다니. 지나치게, 불쌍하다고. 어둠이 가득 내려앉은 골목길, 전쟁 이전에도 이곳엔 슬픔과 좌절만이 있었을 게 분명했다. 그곳에서 살아왔을, 살았지만 결국엔 끝을 보지 못 했을 제 동생이 너무 불쌍해서. 득개는 무의식 중에 뒷걸음질을 쳤고, 그걸 결국 또 붙잡아 낸 것은 수현이었다.
" 도망치지 마. "
라고, 본인이 더 울상인 채로 말해서 영 신뢰감은 없었지만요. 어쨌든, 덕분에 제가 지금 이곳에 있는 거죠. 이곳에는 그 녀석의 흔적이 가득했어요. 꿈꿔왔던 세상은 무엇인지, 입버릇처럼 말하던 밝은 미래에 무엇이 존재 할 지. 그 모든 대답이 이곳에 있었죠. 그 녀석은, 여기 살아 있어요. 지금도, 여전히... 그래서, 처음으로 깨달았어요. 바보 같다고 생각했던, 그 모습을. 그래도, 역시. 응원해주고 싶었다는 걸요. 너무 늦게 깨달았지만요. 겸연쩍게 웃음소리 흘린 득개가 천천히 잠뜰과 시선을 맞춰왔다.
" 만족하냐고 물으셨죠? "
모르겠어요. 잔잔한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는 한결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여전히 또렷한 회백색 눈동자가, 그 얼굴을 가만 응시한다. 거짓도, 숨기는 것도 아무것도 없는 순수한 진심. 그 얼굴에는 어떠한 미련이나 후회 같은 것이 남아 있지도 않았다. 이곳에 와서, 저는 많이 변했거든요.
하나하나, 덕개의 흔적을 알아가고 또 찾아가며.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어요. 어쩌면, 저는
덕개의 삶을 대신 살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아니면, 이게 원래 제 모습이었을지도 모르고요. 그러니까, 만족하냐는 질문은... 역시 대답하기 어렵네요. 한참이나 제 손가락 꼼지락 거리던 득개가, 그제야 맑은 웃음을 띄워냈다.
" 두 분, 닮았네요. "
잠뜰에게서 멍한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역시, 그렇죠? 득개의 얼굴 위로 절망이나 좌절 따윈 하나도 모를 법한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 모습 틈으로, 순진하게 웃던 덕개의 얼굴이 겹쳐 오른다. 잠뜰은 결국 노트에 빼곡히 적어왔던 질문들을 전부 지워낼 수 밖에 없었다. 제멋대로 과거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득개는, 이미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질문들은 더이상, 득개에게 필요 없는 것들이다. 삶은 이어진다, 누군가에게 전하지 않더라도 이어지는 마음이 있다. 눈으로 보이지 않아도,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모든 순간을 잊을 수는 없는 법이다, 나아간다고 해서 후회가 없다는 말 또한 아니다. 전쟁 전에도, 후에도 누군가는 언제나 치열한 순간을 살았다. 그것에 만족 따위는 필요 없다, 그저 살아갔고 살아 갈 거니까. 그거면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한다. 결국 짧은 웃음 같은 한숨이 새어나온다. 펜을 내려 놓은 잠뜰의 눈꼬리가 장난스레 접혀 올라갔다. 득개씨,
" 무장강도 일은 그만 뒀어요? "
깜빡, 빠른 속도로 두 눈 끔뻑거리던 득개가 순간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선다. 덜커덩, 의자가 요란하게도 소리를 흘려 보냈다. 잠뜰씨, 지금 언제적 이야기를...! 큭큭, 짧은 웃음 소리 흘린 잠뜰이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 칼 겨누면서 쫄아 계신 거 엄청 웃겼거든요. 득개의 매서운 눈초리가 자신을 쏘아보는 게 느껴졌지만, 즐거운 듯 떠오른 웃음은 떨어질 줄을 모른다. 완전히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한결같이 놀리는 맛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도,
" 보기 좋아요. "
지금 모습, 말 끝맺은 잠뜰이 의자에 걸어뒀던 코트를 걸쳐 입는다. 녹음기에 빨간 버튼을 다시 누르자 화면 위로 깜빡거리던 숫자가 완전히 멈췄다. 그대로 다시 가방 옆주머니에 녹음기를 쑤셔넣고, 올려뒀던 가방을 어깨에 둘러매자 한참을 멍하니 멈춰 서 있던 득개가 그제야 정신 차린 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벌써 가시게요? 네, 잘 지내시는 것 같으니까 됐어요. 흘끗, 시계를 한 번 더 확인한 잠뜰이 다시금 개구진 웃음을 띄운다. 저도, 마음 같아선 더 이야기 하고 싶은데...
" 누구누구씨 덕분에, 시간이 많이 지체 됐거든요. "
" 아아아아!! 그럼 잠깐만요, 잠깐만.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
여태까지도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안절부절하던 득개가 결국 다급하게 잠뜰을 붙잡았다. 그러곤 진즉 나갈채비 전부 끝마친 잠뜰을, 기어코 어정쩡한 자세로 세워놓곤 급하게 어딘가로 가버린다. 끔뻑, 갑작스러운 상황에 멀뚱히 눈만 끔뻑거리던 잠뜰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뭐, 사실 시간이 그렇게 촉박한 건 아니니 별 상관은 없지만. 잠뜰이 덕개가 사라진 쪽을 응시했다. 라디오에선 여전히 잔잔한 발라드 곡이 흘러 나온다. '후회하지 않아요, 후회하지 않을게요.' 누가 작사한 건지, 꽤나 오글거리는 가사였다. 툭, 한 쪽 벽에 머리 기대 비스듬히 선 잠뜰이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기다리는 동안 노래 감상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1분, 5분.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잠뜰의 얼굴 위로 불퉁한 기색이 떠올랐다. 탁탁, 신경질적으로 제 팔목 두들기던 손이 결국 완전히 멈춘다. 불충분한 설명만 남겨두고, 사람을 이렇게 기다리게 만들어도 되는 거야? 결국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잠뜰이 날카로운 눈빛 하곤, 득개가 사라진 쪽으로 발을 뻗으려던 순간이었다. 우당탕, 거창한 소음이 들려온다. 득개가 향한 방향이었다. 몇 년이 지나도, 날카롭게 벼려졌던 예민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총의 소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몸싸움의 가능성도 무시 할 순 없었다. 다른 비명 소리는 안 들리는 걸로 보아, 상대가 득개씨의 입을 막아 버렸을 수도 있다. 생각은 빠르게 회전하고, 그보다 앞서나가는 몸은 멈출 줄을 모른다. 다급한 두 발이, 곧장 소리의 근원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 득개씨! "
잠뜰이 다급하게 나무 문을 열어 젖히자, 새하얀 먼지가 자욱하게 올라왔다. 무슨, 콜록. 급하게 고개 돌린 잠뜰이 연신 기침을 해대면, 아야야... 어둠 속에서 희미한 득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퍼뜩, 정신 차린 잠뜰이 다시 득개의 상태를 살폈다. 득개씨, 괜찮아요? 어두워서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의 잔해들 틈으로 강아지 귀 하나가 쫑긋거렸다. 불쑥, 이어 엄지 하나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멍한 눈으로 그것 가만 응시하던 잠뜰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
" 그래서, 뭐 하신 거예요? "
" 그게... 한동안 창고정리를 안 했더니. "
하하, 영 머쓱하게 볼 긁적거리며 매섭게 쏘아지는 잠뜰의 시선을 득개가 슬금슬금 피했다. 그으러니까아, 사람을 세워두고 왜 창고에 가셨냐고 묻고 있잖아요? 기자의 기본 수칙, 사건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 것. 그말대로 잠뜰은 물러날 생각 따윈 없었다. 집요한 시선을 돌아선 옆얼굴에 쏘아붙이면 그제야 작게 한숨 내뱉은 득개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 이거, 받으세요. "
불쑥, 득개가 내민 것은 한 손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그림이었다. 고급진 금색 프레임의 액자에 비해, 먼지 뽀얗게 쌓인 유리 너머로 보이는 것은.
" ...낙서? "
형편없는 그림이었다. 잠뜰이 무심코 내뱉자, 득개가 크흠. 짧은 헛기침을 했다. 형편 없는 거, 저도 아니까 더 말하지 마세요. 여전히 그림 받아들지 않은 잠뜰이 멀뚱히 득개를 쳐다보자, 득개는 영 곤란한 듯 시선이나 또 피해댔다.
" 이거, 싸움장 같은 건 아니죠? "
" 아니거든요! "
장난 반, 농담 반. 잠뜰이 던진 질문에 결국 득개 또한 똑바로 시선을 맞춰온다. 그러게, 왜 자꾸 우물쭈물 거리세요. 이게 뭔데요? 그림 받아든 잠뜰이, 액자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물었다. 그 모습, 조금 묘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득개에게서 또 한 번 짧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 제가 그린, 첫 그림이요. "
깜빡, 전혀 예상치 못 한 말에 잠뜰의 동공이 놀란 듯 확장 됐다. 영 부끄러운지 시선 피한 득개가, 결국엔 진심을 고한다. 여기 처음 와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땐 정말로 형편 없었거든요. 남이 하는 걸 구경했을 땐, 그렇게 쉬워 보였는데. 직접 해보니까 엉망진창이었죠. 노래도, 마찬가지고요. 하나도 쉬운 게 없었어요. 하나도. 음, 그거야 그렇겠죠. 잠뜰이 작게 고개를 끄덕거리면 득개가 어쩐지 한숨 섞인 웃음을 내뱉는다.
" 그래도, 지금은 잘 하거든요. "
잠뜰은 아까 보았던 득개의 그림을 떠올려낸다. 따듯한 느낌이 물씬 나는 색감, 조금 투박하지만 섬세한 붓의 터치. 얼핏 살펴본 게 다였고, 더군다나 미완성이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따듯해 지는 그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확실히 지금 제 손에 들린 액자 속 그림과 같은 사람이 그린 거라곤 믿기 어려웠다.
" 잠뜰씨 드릴게요. 일종의 선물이죠. "
한 번 더 옅은 웃음 짓는 득개를 잠뜰이 빤히 응시한다. 그러니까,
" 짬처리 라는 거죠? "
" ...받기 싫으시면 돌려주실래요? "
또 한 번 장난스러운 잠뜰의 말에, 득개가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냈다. 결국 잠뜰이 작은 웃음소리를 터트린다. 치사하게, 줬다 뺏게요? 득개는 할 말을 잃었는지 입만 몇 번 뻐끔거렸다. 이어, 입 댓발 내밀더니 무어라 꿍얼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사람이 기껏 생각해서 가져왔더니...... 그 투덜거림을 잔잔한 배경음으로 삼은 잠뜰이 다시 한 번 손에 들려진 액자 속 그림을 살펴본다. 스윽, 조심스레 손으로 먼지 쓸어 내리면. 7살 어린아이가 그린 것만 같은 형편없는 그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애를 쓴 티가 나는 부들거리는 선. 꼼꼼하게 칠하고자 노력한 물감 같은 것들. 또, 이게 도대체 무어라고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액자를 씌워둔 점이나. 여전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모습까지. 이 그림이 득개에게 어떤 의미일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리고, 이걸 자신한테 준 의미도.
내가 그렇게 힘들어 보였나, 자신의 행적 천천히 되돌아 보던 잠뜰이 결국엔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에 여지껏 꿍얼거리던 득개의 시선 또한 잠뜰에게로 향했다. 득개가 처음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 했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 여태까지 나아오기 위해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거쳤는지. 고작 이 그림 하나로도 어쩐지 그것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한참이나 더 그림 빤히 응시하던 잠뜰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공중에서 두 사람분의 시선이 맞아 떨어진다.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는 한결 부드러운 웃음을 연출해 냈다.
" 고마워요, 득개씨. "
놀란 듯, 두 눈 끔뻑이던 득개 또한 결국엔 작은 웃음 소리를 터트렸다. 저야말로, 고마워요.
-
" 득개씨, 꼭 유명해지셔야 해요? "
철문의 문고리 위로 손 올린 잠뜰이 문득,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야, 나중에 유명해 지셨을 때 이걸 첫 그림이라고 팔아 먹죠. 시선 맞춰오는 잠뜰의 말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에 득개가 옅은 웃음으로 화답한다. 네, 그럴게요.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 끄덕인 잠뜰이 끼익, 처음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영 요란스런 소리를 내는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문앞에, 다른 사람의 인기척이 있었다.
" 어라, 잠뜰씨? "
기자가 가져야 할 두번째 수칙, 예민한 감각을 가질 것. 잠뜰은, 이 옥구슬처럼 높은 목소리의 주인이 아까 전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던 또 다른 목소리의 주인과 동일하다는 정보를 아주 손쉽게 알아차렸다. 동시에, 일전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 또한 알아차린다. 은은한 보랏빛이 감도는 검은 머리칼, 그 사이로 쫑긋거리며 튀어나온 하얀 토끼 귀. 등 뒤에 매고 있는 기다란 기타,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가지런한 머리칼들을 마구 스치고 지나갔다. 깜빡깜빡, 예상치 못한 상황에 동그랗게 뜨인 주홍빛 눈동자와 마찬가지로 둥그렇게 확장 된 회색빛 눈동자가 공중에서 맞부딪혔다. 동시에, 제 뒷쪽에서 한껏 반가움 담긴 득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수현씨! "
#02
-두 번째 다정
흰 가운이 바쁘게 펄럭 거린다, 분주한 발걸음이 이곳저곳 돌아 다니고 알아 듣기 어려운 의학 용어들이 줄지어 이어진다. 도륵, 도르륵. 바쁜 발걸음의 움직임 따라 잠뜰의 회백색 눈동자 또한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쫑긋거리는 토끼귀나, 공중에서 찰랑 거리는 검은 머리칼. 완전 직모네. 쓸데없는 감상이 퐁퐁 떠오를 때 쯤, 다급한 발소리 하나가 들려온다. 보폭이 작은건지, 묘하게 여러번 들리는 발걸음 소리 뒤로 이어지는 맑은 목소리.
" 선생님! "
폴짝, 양갈래를 예쁘게 묶은 어린아이 하나가 거의 뛰어들듯 수현에게로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랄 법도 한데, 곧장 작은 아이 하나 받아낸 수현의 얼굴 위론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병원에선 뛰면 안 된다고 말했죠? 장난스레 볼을 잡아 당기는 손길이 퍽 익숙했다. 깜빡, 느릿하게 끔뻑거리는 회백색 눈은 또 과거의 파편 하나를 떠올려 낸다. 그 당시 수현은, 모든 걸 두려워 했었다. 정확히 말하면, 다가서는 사람들 전부를. 본인 나름대로 티를 내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던 것 같지만, 기자의 예민한 감까지 피해 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만큼 타인에게 제멋대로 다뤄졌으니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도 아니었다. 하지만, 잠뜰은 구태여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 당시 잠뜰은 제 한 몸 건사하기에도 벅찼고, 수현은 다른 사람들의 비하면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적어도, 괜찮은 척 숨겨 낼 수 있다는 건 그 세계에선 그런 의미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제각각의 상처를 살피기도 급급해서, 속까지 들여다 볼 여유는 없었다. 톡톡, 기다란 손가락 하나가 탁자를 몇 번인가 두드렸다. 그랬던 수현이, 지금은 저토록 꾸밈 하나 없이 솔직한 웃음을 짓고 있다. 신기한 변화라기엔, 예상 가능한 범위였고. 저 모습이 자연스럽다기엔, 무언가의 이질감이 느껴졌다.
수현이 병원에 돌아간다고 선언 했을 때, 그의 성정을 생각하면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수현은 다른 사람들과는 상황이 달랐다. 자신의 원래 직업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그들이 자신의 직업을 저주하게 될 이유가 없었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렇지만, 수현은. 자신의 직업을 저주하고 원망하고 일평생의 꿈을 부정하기에도 충분한 사건을 겪었다. 그럼에도, 또 다시 나아가겠다고 말한다. 잠뜰로선 이해하기 어려웠고, 여전히 이해하지 못 한 채다. 아마 앞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울 터였다. 저 평화로운 풍경은, 처음부터 수현에게 온전히 주어졌던 것과 같다. 그걸 잠깐 빼앗겼을 뿐이고, 그렇기에 저 속에 자연스레 녹아든 모습이 이제 와서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
어쩐지, 언젠가의 수현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제 표정에서 그렇게 티가 났던건지, 혹은 수현의 눈치가 지나치게 빨랐던 것인지. 수현은, 병원으로 떠나기 직전 그런 말을 남겼었다. 이번에 다시 약을 만드는 건, 강제도 아니고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고. 그저,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수현이 지어보인 우음은. 깜빡, 잠뜰의 회백색 눈동자가 빠른 속도로 끔뻑거린다. 그러고 보니, 그때의 표정과 지금 수현의 표정은 아주 꼭 닮아 있었다. 아, 그런건가...... 깨달음을 얻은 잠뜰에게서 옅은 한숨 같은 것이 새어 나왔다. 어쩌면, 득개 때와 마찬가지로 노트 가득 빼곡히 적어놨던 질문을 전부 수정해야 할 지도 몰랐다.
잊을 수 없는 것
pg.82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 사이로 은은한 커피 향이 섞여든다. 온통 새하얀 공간, 흘러 나오는 잔잔한 클래식 곡. 모든 요소들이 마음을 평안하게 만들어 준다. 탁, 잠뜰의 앞에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머그잔 하나가 내려진다.
" 인터뷰라면 화실에서 했어도 됐을텐데. "
장난스레 웃어보인 수현이 자신 몫의 머그잔을 들고 잠뜰의 앞에 자리잡는다. 마찬가지로 옅은 웃음만 짓던 잠뜰이 여지껏 만지작 거리던 녹음기의 버튼을 누른다. 달칵, 경쾌한 소리와 함께 검은 화면 위로 시간을 알리는 숫자가 떠오른다.
" 아뇨, 반드시 이곳이었어야만 했죠. "
왜요? 꽤 단호한 잠뜰의 반응에 수현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저 쫑긋거리는 토끼귀와 놀란 듯 둥그렇게 뜨이는 눈매는 정말로 토끼의 모습과 꼭 닮아 있었다. 쓸데없는 감상만 남기며 잠뜰이 한 쪽 구석에 치워뒀던 카메라를 톡톡, 두들긴다.
" 사진이 필요했거든요. "
" 사진이요? "
네, 사진. 보실래요? 잠뜰이 건넨 카메라를 받아들자, 까만 액정 위로 행복한 듯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약을 제조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 옆으로 넘길수록 수많은 사진이 나왔지만, 하나같이 자신은 행복한 듯 웃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많이 웃었나. 이렇게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감회가 새로운 기분이었다. 쭉쭉, 사진을 넘기던 수현이 문득 바쁘게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춘다. 어라,
" 이건, 득개씨네요? "
화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사진에는, 득개가 즐거운 듯 웃고 있는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마찬가지로, 시선은 카메라가 아닌 그림에 고정 된 채였지만. 사진 속 득개의 모습은 정말로 진심으로 행복한 것처럼 보였다. 잠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취재는, 여러분의 일상을 담는 게 목적이니까요. 그 말에 또 다시 놀란 듯 동그랗게 화장 된 주홍빛 눈동자가 자신에게로 고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어쩐지, 영 부담스러운 시선이라 괜시리 커피나 한 번 홀짝 거린 잠뜰은 이어 미간을 옅게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커피의 맛이 지나치게 연했다. 잠뜰이 아는 수현은 커피를 못 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과 마찬가지로 카페인 중독에 가까웠던 수현이 내리는 커피는 아주 기가 막힐 정도로 잠뜰의 취향이었다. 그런데, 이런 맹물이라니. 확실히 득개가 탔던 것보단 훨 나았지만, 의도적으로 연해진 커피는 여전히 먹을 맛은 못 되었다.
" 수현씨, 커피가 너무 연한데요? "
" 건강에 안 좋으니까요. "
이것도, 자스민 차. 톡톡, 제 머그컵 두들긴 수현이 장난스런 웃음 소리나 흘려 댔다. 어쩐지, 당한 듯한 기분에 잠뜰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구겨진다. 잠깐의 신경전, 공중에서 교환하던 시선. 결국 잠뜰에게서 포기의 한숨이 터져나왔다. 웃는 사람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더니, 실제로 수현의 저 부드러운 웃음을 보고 있자니 더 따질 이유도 없어진 탓이었다. 픽, 옅은 한숨 같은 웃음이 새어나온다. 도륵, 굴러간 회색빛 눈동자가 결국 도착하는 것은 한 쪽 구석에 가지런히 세워져 있는 기다란 기타 케이스였다. 잠뜰의 시선이 잠깐인가 그곳으로 고정된다. ...수현씨,
" 기타는 왜 배우기 시작하셨어요? "
끔뻑, 예상치 못 한 질문이었는지 금세 동그랗게 변하는가 싶던 눈가가 이어 부드럽게 휘어접힌다. 하하, 터지듯 작은 웃음 소리. 잠뜰씨, 저한테 그런 사적인 질문 처음인 거 아세요?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건지, 수현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웃음기가 가득 묻어났다. 톡톡, 일정한 손길이 머그잔의 손잡이를 쓸어내린다. 일순, 가라앉은 주홍빛 눈동자 위로 어렴풋한 감정이 스치는 것을 잠뜰은 놓치지 않았다. 글쎄요......
" 잘은 모르겠지만, 덕개씨의 노랫소리 정말 좋았으니까요. "
득개씨랑 같이 작업 하는 게 재밌기도 하고요. 잠뜰은 그에 대해 아무런 말도 얹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공간 사이로 또 다시 고요한 정적이 내려 앉았다, 그 틈으로 희미하게 들리는 분주한 병원의 소음이나 작은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 같은 것도. 회백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굴러 여전히 쫑긋 세워져 있는 토끼귀에게로 향한다. 덕개의 죽음은 모두에게 커다란 상처로 남아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수현은 유독 그 사건에 민감했다. 덕개가 죽기 직전까지 곁에 남아 있던 것은 다름아닌 약사였던 수현이었으니까.
젊은 예술가 덕개는, 처음 쉘터에 왔을 때부터 조금 허약한 편이었다. 솔직히, 이런 전쟁통에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 신기 할 정도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덕개가, 결국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전에 쉘터로 돌아오지 못 했을 때는. 당연하게,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와서 타인의 죽음이 슬프지도 않았고, 또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었기에. 쉘터 속 모든 사람들은, 어렴풋이 덕개의 죽음을 예측했었다. 하지만, 그 끈질긴 생명력은 결국 꺼지지 않고 쉘터로 돌아왔고. 그런 덕개의 회복을 위해, 옆에서 밤낮으로 힘을 썼던 것이 수현이었다. 약사로서의 사명이었을지, 책임이었을지. 잠뜰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결국 덕개가 떠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곁을 지키고 있던 것은 수현이었다.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손을 꼬옥, 붙잡고.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것도 수현이었다. 눈물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그곳에 누구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생존을 위한 수분보충은 필수였고, 우는 것은 낭비일 뿐이다. 아니면, 이제와선 더 흐를 눈물조차 없을 정도로 눈물샘이 말라 버렸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잠뜰은 제멋대로 생각했다. 푹 숙인 수현의 고개가, 평소와 다르게 접혀버린 토끼귀가. 꼬옥 붙잡은채로 희미하게 떨리는 손이, 수현이 흘리는 눈물이라고. 그렇기에, 잠뜰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잠깐 내려앉는 정적 사이로 보이는 수현의 표정만으로도, 묻지 않은 질문의 대답을 알 수 있었다. 괜시리 머그잔의 표면 만지작 거리던 잠뜰이 느릿하게 수현의 주홍빛 눈동자를 응시한다. 그러면, 또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가가 있다.
" 원래 노래 좋아하셨어요? "
" 뭐, 싫어하지는 않았어요. "
영 뜬금없게 들릴 잠뜰의 질문에도 수현은 언제나처럼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픽, 한숨 같은 웃음이 잠뜰에게서 터져 나왔다. 생각해 보면,
" 우리 서로에 대해 하나도 모르네요. 그렇게 오래 지냈는데도요. "
느릿하게 두 눈 끔뻑거리던 수현 또한, 결국엔 옅은 웃음 소리를 흘렸다. 부드럽게 접혀 올라간 입꼬리가, 퍽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 살기에 급급했으니까요. "
그렇죠? 작게 동의한 잠뜰이 한 번 더 작은 웃음소리를 흘린다. 이제와서, 새삼스레 수현과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 영 웃기게 느껴진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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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수현과 주고받은 대화들은 대부분 평범한 것들이었다. 사소한 취미부터, 좋아하는 음식이나 싫어하는 행동 같은 것들. 이제와 묻기엔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다시금 서로를 알아가기엔 충분한 그런 것들. 데룩, 굴러간 회백색 눈동자가 녹음기에 떠오른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다음으로 움직 일 시간이었다. 다시 한 번 구른 회백색 눈동자가 눈앞 사람 응시하면, 문득. 수현의 고개가 한 곳으로 돌아가 고정되어 있었다. 잠뜰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를 쫓는다, 주홍빛 시선을 따라간 종착지에는 즐거운 듯 웃는 사람들의 얼굴이 있었다. 꼭, 한 폭의 그림같은 장면 이었다. 따듯한 오후의 햇살이 새하얀 벽지에 반사 되고, 퐁퐁 떠오르는 먼지더미 사이로 흘러드는 맑은 웃음소리. 사람들의 얼굴 위로 떠오른 건, 절망이나 경계 따위가 아니고 기쁨과 즐거움 뿐. 느릿하게 깜빡이는 회백색 눈동자는 마음 언저리 깊숙한 고에 묻어뒀던, 작은 죄책감 하나를 떠올리게 했다. 살기 위해 병원을 약탈했다,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의료진들을 외면하고. 상자 속에 물건들을 빼돌렸다,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 했던 치부. 잠뜰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생각을 전부 끝마치기도 전에 목소리가 제멋대로 앞서 튀어나간다. 수현씨는,
" 왜 사람들을 구하시는 거예요? "
깜빡, 일순 동그랗게 뜨였던 주홍빛 눈이 이어 장난스레 휘어 접힌다. 흐응,
" 그거 기자로서의 질문이예요, 아니면 잠뜰로서의 질문이예요? "
마주쳐오는 시선에, 잠뜰은 습관적으로 바닥으로 시선을 고정시킨다.
" ...글쎄요, "
" 취재라면 전에 충분히 응해 드렸던 것 같은데... "
집요한 시선이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한참이나 빤히 잠뜰을 응시하던 수현에게서 결국. 픽, 한숨 같은 웃음이 새어나온다. 뭐, 좋아요. 수현이 느릿한 손길로 머그잔을 한 번 쓸어내렸다. 여전히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반투명한 색의 노랑빛 물. 홀짝, 따듯한 차는 언제나 몸도 마음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법이었다. 탁, 다시금 머그잔 탁자 위로 내려놓은 수현의 얼굴 위로 부드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 이유 같은 건 없어요. "
그냥, 즐거워서 하는 거거든요. 이 일에 어떠한 의무감이나 사명감도 느끼지 않아요. 할 수 있고, 즐거운데 하지 않을 이유도 없잖아요? 깜빡, 이번엔 잠뜰의 눈이 놀란 듯 동그랗게 뜨인다. 그에 수현은 결국 또 한 번 작은 웃음소리를 터트린다. 잠뜰씨,
" 요즘도 잘 못 주무시죠? "
조금 창백한 얼굴 위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아주 짙은 다크서클. 그건, 잠뜰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결같이 그곳에 존재했는데. 진해지면 더 진해졌지, 옅어질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하기사, 거의 중독처럼 그렇게 카페인을 매일같이 때려 마시는데 괜찮아지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잠뜰의 얼굴 가만, 응시하던 수현이 조금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약을 마음대로 제조하는 건 불법이지만...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수현이, 자연스레 자신의 책상으로 가더니 그 위에 놓여있던 작은 토끼 인형 하나를 집어든다.
" 이정돈, 드릴 수 있죠. "
불쑥, 이어 자연스레 잠뜰의 앞에 분홍빛 토끼 인형을 내민다. 손바닥 하나 크기에 그 인형은, 솜털이 가득 들은건지 보드랍고 말랑한 촉감을 가지고 있었다. 얼떨결에 인형 받아든 잠뜰이, 수현과 인형을 번갈아 가며 쳐다본다. 수현씨,
" 생각보다 되게 귀여운 취미를 가지고 계시네요. "
그도 그렇지 않은가, 180을 훌쩍 넘는 거구의 성인 남성이 가지고 있기엔 지나치게 작고 귀여운 인형이었다. 꼭, 여서일곱살 짜리나 가지고 놀법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인형. 결국, 수현에게서 또 한 번 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 그거, 여기서 처음으로 치료해 줬던 애가 주고 간 거예요. "
깜빡, 회백색 눈동자가 빠르게 끔뻑인다. 기자의 기민한 감이 또 한 번, 미묘한 분위기의 차이를 캐치해 냈다. 저요, 사실 처음 몇 달은 내내 불면에 시달렸거든요. 아무리 커피를 때려 박아도, 수면제까지 먹어봐도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죠. 눈을 감으면, 다시 그곳에 갇혀 버릴까봐. 사실 지금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봐. 그 끔찍한 악몽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 했을까봐, 매일밤을 불안에 떨었어요. 하루아침에 휴전이라고 해봤자, 솔직히 믿기 어렵잖아요? 작은 소리 하나에도 예민하게 경계하느라, 3시간만 자도 깊게 잔 편이었죠. 사람들과 함께 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들의 호의를 의심하게 됐고. 이 더럽혀진 손으로, 제가 감히. 이런 생활을 가져도 될지, 매일밤이 후회와 속죄의 시간이었어요. 그러다 하루는, 감기에 걸린 아이가 찾아왔어요. 별로 심각한 감기는 아니어서, 약 조금 지어주고 돌려 보내려는데. 문득, 그 아이가 그러는 거예요.
" 선생님도 악몽을 꾸는 거예요? "
라고, 내가 그렇게 티가 났나. 싶어서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있으니까, 그 토끼 인형을 줬어요. 악몽을 먹어주는 토끼 인형인데, 이제 자긴 다 커서 필요 없으니까 선생님 주겠다고.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죠, 여전히 과거에 묶여 살고 있던 건 다름아닌 저 스스로였으니까요. 남들한텐 이제 다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입에 발린 소리를 잘만 해댔으면서. 정작 본인은 못 벗어났다니, 우스웠어요. 도륵, 굴러간 수현의 눈동자가 창문 통해 들어오는 따듯한 한낮의 햇볕을 가득 받는 기타 케이스를 가만 응시한다. 지독하게 평화로운 풍경, 지나치게 다정한 사람들. 한 때는 그 모든 것들이, 자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도륵, 한 번 더 굴러간 주홍빛 눈동자가 다시금 눈앞에 사람을 마주한다. 잔뜩 피곤해 보이는, 여전히 몇 년 전 그때와 비슷한 모습의 사람.
" 신기하게, 그 인형을 받은 뒤로는 정말로 잠이 잘 오더라고요. "
커피도, 그래서 끊을 수 있던 거고요. 생긋, 한 번 더 그린 듯 부드러운 미소 띄운 수현이 느긋한 손길로 책상을 몇 번 두들긴다. 그 당시 수현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지나치게 불안정 했다. 누군들 안 그러겠다만은,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던것도. 잠깐의 휴식도 취하지 않고 병원으로 길을 나선것ㄷ, 가만히 있다간 정말로 미쳐 버릴 것만 같아서. 그러니, 의도적으로 몸을 움직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구태여 별다른 노력 없이도 이 지나치게 평화로운 일상이 온전한 자신의 일부로 느껴졌다.
" 그러니까, 이제 저한텐 필요 없어요. "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봄의 따듯한 기운을 잔뜩 머금은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 부드럽게 휘날리는 검은 머리칼, 그 사이로 선명하게 보이던 주홍빛 눈동자가 일순 부드럽게 접혀 올라간다. 이어, 아주 자연스레 올라가는 입꼬리는 처음부터 그 자리가 자신의 위치였던 듯 완벽하게 들어 맞았다. 순식간에, 어린아이와 닮은 맑은 웃음 하나가 수현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요, 잠뜰씨에게도요. "
여전히 두 눈 동그랗게 뜬 채의 잠뜰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전에도 수현은, 꽤 부드러운 기색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날카롭게 세운 경계심이 언제나 함께였다. 하지만, 지금의 수현에게선 그런 기색은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남은 것은, 따듯한 다정감과 순수하게 즐거운 마음가짐 뿐. 예전엔 지나치게 현실적인 사람이라고만 여겼는데, 지금 수현에게 현실적이란 말은 조금도 어울리지 않다. 그 앞에선, 누구라도 웃음을 터트리게 되는 법이었다. 잠뜰 또한 예외는 아니었는지, 결국 작은 웃음소리 같은 것이 새어나온다. ...수현씨,
" 득개씨랑 닮았네요. "
그 뒤로 쓴 약 100개를 한 번에 삼킨 사람마냥, 곧장 거칠게 구겨지는 수현의 표정은 지금 생각해봐도 꽤 볼만한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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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18분, 느지막한 대화를 끝으로 꼼꼼히 챙긴 짐이 담긴 가방 둘러맨 잠뜰이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서려던 발걸음을 멈춘다. 문고리에 손을 올린 그대로 수현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부드럽게 손을 흔들며 배웅하던 수현이 의문 섞인 고개를 살짝 기울여 보였다. 그러고 보니,
" 수현씨는 각별씨랑 연락 닿아요? "
각별, 쉘터에서 지내는 내내 바깥의 물자를 조달해 줬던 어딘지 모르게 조금 괴짜였던 보부상. 아무리 연락을 넣어봐도, 도저히 답장이 돌아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선. 자신은 차단 당했거나, 애당초 잘못 된 번호거나 둘 중 하나였다. 각별의 현재 직업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잠뜰로서는 그에게 다시 연락을 취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생명의 은인인 수현이라면 무언가 다를지도 몰랐다. 깜빡, 동그랗게 뜨인 주홍빛 눈동자가 빠르게 끔뻑인다.
" 그 사람은 왜요? "
" 이번 취재에 각별씨도 포함시키고 싶은데, 영 연락이 안 닿거든요. "
아... 수현이 알만하다는 듯, 탄식에 가까운 소리를 흘렸다. 어쩐지, 곤란한 듯 눈웃음 지은 수현이 가볍게 어깨나 으쓱였다. 데룩, 생각을 거치는 주홍빛 눈동자가 한 번 굴러간다.
" 각별씨랑은, 저도 연락이 안 닿아요. "
" 안 닿는다고요? "
네, 뭐라고 하셨더라. 수현에게서 작은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 생명을 구해준 건 고맙지만, 그건 그거고 나는 갚을만큼 갚았다. "
라고, 하셨었죠. 수현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지만, 각별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아마 저 말은 농담 따위가 아니라 순도 200%의 사실일 것이다. 잠뜰의 얼굴 위로 조금 질린 듯한 표정이 떠올렸다.
" ...완전 싸가지. "
그렇죠? 여전히 작은 웃음소리나 흘리던 수현의 토끼귀가, 한 번 가볍게 쫑긋거린다. 뭐, 그렇지만... 도륵, 끝맺지 않고 연결되는 문장에 잠뜰의 시선이 곧장 수현에게로 향한다. 그 사람이라면, 아마.
"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
영 이해 할 수 없는 문장의 흐름에, 잠뜰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여진다. 그러면 수현에게서 또 한 번, 즐거운 듯 작은 웃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분명 아주 자연스럽게요.
#03
-세 번째 다짐
" 아줌마. "
삐딱한 자세, 얼핏 중학생 쯤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 하나가 아주 당당하게 양 손을 뻗어온다.
" 여기까지 오셨는데, 용돈 주셔야죠? "
개구지게 접혀 올라간 눈썹, 해맑게 웃고 있는 입꼬리가 영 얄미웠다. 작은 신경전, 공중에서 두 사람 분의 눈빛이 매섭게도 맞부딪혔다. 부글부글 끓는 속 겨우 진정시킨 잠뜰이, 내밀어진 양손 위로 조금 거칠게 5만원짜리 두어장을 내려놓았다. 와, 감사합니다! 대강 감사인사한 어린 아이는 그대로, 폴짝 거리며 저 멀리로 뛰어가 버린다. 한결같이, 싸가지라곤 없는 아이였다. 덕개가 구한, 반란군의 딸. 옆에서 곤란한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죄송합니다, 애가 버릇이 조금... 덧붙여오는 사과의 말도. 잠뜰의 고개가 느릿하게 돌아간다, 부드럽게 접혀 올라가는 눈꼬리는 괜찮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 오늘의 3번째 목적. 은서의 아버지이자, 과거 반란군. 바로, 눈앞에 이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남자였다.
잃은 것
pg.246
달칵, 빨간 버튼을 누르자 다시 검은 액정 위로 시간을 카운트 하는 숫자가 떠오른다. 가지런히 노트 정리한 잠뜰이 익숙한 듯 말을 건넨다. 시작할까요? 그에 앞에 앉은 사람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안부, 하나같이 전부 평범한 것들. 하지만, 눈앞에 이 남자가 걸어 온 길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국가를 향한 반란, 좋게 말해서 반란이었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저 악착같은 억지에 가까웠다. 반란군의 대부분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저 살기 팍팍한 현실을 지나치게 많이 깨달았다는 것만을 제외하면. 평생, 칼이나 총 대신 펜이나 종이를 만졌을 사람들. 그렇기에, 정부에서 날카롭게 키워낸 정예군들을 그들이 이긴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전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다란 전쟁이 이어질 수 있었던 단 하나의 까닭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의지와 각오의 차이였다. 그렇기에, 잠뜰은 이 평범한 남자의 손 위로 잔뜩 새겨져 있는 흉터 자국이나. 얼굴 곳곳에 숨겨져 있는 노련한 웃음 같은 것들을 아주 세밀하게 관찰해 낸다. 그렇기에, 끝까지 싸워냈던 단 하나의 이유가 저곳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맑게도 웃고 있는 작은 어린아이 하나 때문이라는 것 또한. 별다른 노력 없이도 깨달아 낸다.
그리고, 동시에 그건 잠뜰이 저 어린아이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앞에서 딸을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거니와, 더군다나 저 아이의 앞에선 이것저것 날카로운 말들을 잔뜩 했던 과거도 있었기에. 나름대로, 죄책감 비슷한 것을 느끼긴 했다. 전쟁통 중에, 어린아이를 얼마나 신경 쓸 수 있겠는가. 그 당시에는 잠뜰 뿐 아니라, 너나 할 것 없이 거친 말들을 어린아이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곤 했었다. 그것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기에, 잠뜰은 애매하게 선한 사람이었다. 솔직히, 아줌마라고 불렀을 땐 정말 한 대 쥐어박을까도 고민했지만. 사회의 건실한 어른인 잠뜰은, 갑작스레 찾아오는 충동도 아주 훌륭한 인내심을 발휘해 잘 넘겨 낼 수 있었다. 인터뷰는 순조로웠다, 앞선 두 사람과 다르게 예상 질문과 예상했던 답변들이 오가고. 착실하게 노트 위로 정갈한 글씨들이 적혀 올라간다. 만족스러운 결과에, 잠뜰의 입꼬리가 작게 끌어 올려진다. 보자, 다음 질문은... 잠뜰의 손가락 위에서 까딱이며 움직이던 펜이 일순 어색하게 멈춰 버린다. 회백색 눈동자가, 빠른 속도로 눈앞 상대를 살핀다. 어쩐지, 가라앉은 눈을 한 눈앞 상대는 인터뷰 와중에도 저 작은 아이에게서 도저히 눈을 떼질 못 했다. 하아, 결국 짧은 한숨 한 번 내뱉은 잠뜰이 노트의 구석을 괜시리 펜으로 찔러대기나 했다. 혹시,
" 후회하세요? "
당황한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던 남자가 결국엔 작은 웃음 소리를 터트린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뜻을 파악하지 못 할 이유도 없었다. 후회라... 글쎄요,
" 많은 사람들을 잃었죠. "
그 원인이 저희라는 것 쯤은 알아요. 처음부터 희생을 각오하고 움직였떤 것도 사실이고, 아마 그때로 돌아가게 된다고 해도 저는 분명 똑같은 행동을 하겠죠. 잔잔하게 내뱉는 목소리를, 날카로운 회색빛 눈동자가 속속들이 살펴본다. 그 안에 짙게 묻어 있는, 작은 미련이나 후회 같은 것들. 하지만, 그보다 더 강렬한 무언가의 확고한 의지. 어디선가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에 맞춰 갈색빛 머리칼이 공중을 나부낀다. 여전히 은서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아버지의 눈동자 위로, 얼핏 작은 죄책감이 스쳐 지나간다.
" 전쟁은 완전히 끝났어요. "
말만 휴전 선언이었지, 저희는 이미 더이상 싸울 힘을 잃었거든요. 처음에 움직였던 이유도, 저 작은 아이들에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어서였는데. 이 짐을 지어주고 싶지 않으니까, 더 나은 세상을 주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움직인 건데, 요즘엔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어쩌면, 제가 더 큰 상처를 안겨 준 걸지도 모른다고요. 줄지어 전해지는 말들에, 잠뜰의 미간이 옅게 찌푸려진다. 지나치게 무책임한 말이었다. 전쟁은 모두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긴다, 직접적으로 연관 돼었던지 아니던지. 누구하나 빠짐없이 깊은 상처를 입었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들은 아직 전부 회복되지 않았고, 그보다 처절하게 망가져버린 사람들의 마음은 앞으로도 완전한 회복을 바라기엔 어려웠다. 그럼에도, 누구하나 반란군에게 직접적인 비난의 화살을 던지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의 의지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확고하고 강인한 용기. 아무도 나서지 못 했을 때, 그것이 잘못됐고 부당함을 알리며 쟁취하고자 움직였던 노력. 그렇기에, 적어도 눈앞에 이 사람만큼은 흔들려선 안 됐다. 그건, 자신의 대한 예의도 아니었으며. 저기서 뛰어놀고 있는 자신의 딸에 대한 사과도 될 수 없었다. 그저, 비겁자의 도망일 뿐이다. 인상 팍 찌푸린 잠뜰이 무어라, 말을 내뱉으려던 순간이었다.
" 그런 어중간한 마음으론 처음부터 시작도 하지 마셨어야죠. "
불쑥, 끼어드는 낯설지만 익숙한 목소리에 잠뜰의 고개가 재빨리 돌아간다. 바람 결에 따라 공중에서 찰랑거리는, 길게 늘어트린 새까만 머리카락. 한 번 팔락거린 코트자락 깊숙이 손을 찔러넣은 이는, 걸음걸이마져 어쩐지 일반적인 것과는 다르다는 인상을 새긴다. 그 사이로, 선명하게 빛나는 노란 눈동자가 개구지게 구겨졌다.
" 조카 데리러 왔수다. "
씨익, 끌어 올려지는 한 쪽 입꼬리에 잠뜰의 눈이 곧장 동그랗게 확장 됐다. 이어, 은서의 옆에서 놀고 있던 또래 남자아이 하나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뛰어온다.
" 삼촌! "
#04
-네 번째 미래
달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온통 새까만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 하나가 밝혀진다. 네모난 탁자 위에, 작은 전등 하나. 그것이 이 방을 밝히는 유일한 불빛이었다. 마치 심문 당하는 용의자처럼 탁자 한가운데에 정갈히 앉은 잠뜰이, 고개를 푹 숙인다. 비좁은 직사각형의 공간에 고요한 정적만이 가라앉아 있었다. 눈앞에, 매서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남자는 잠뜰의 깊은 속내까지 전부 파헤칠 기세다. 그래서, 기자씨.
" 특종은 좀 물어오셨수? "
잠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껏, 목소리를 깐 채의 각별이 위협적으로 잠뜰의 앞에 서류철 더미를 내려놓았다. 잠뜰의 시선이 그곳으로 그 손길을 따라 마구잡이로 움직인다. 그쪽이, 요즘 쓸데없는 기사를 많이 쓰던데 말이야... 그러면 이쪽이 곤란하거든? 각별이 내민 종이 위에는, 얼마전 잠뜰이 써내렸던 글 몇 문장이 올라와 있었다. 기자 일은 그만둔지 오래였지만, 예전 직장 동료의 간곡한 부탁으로 겨우 몇 개 적어 올린 게 다인데. 이걸 도대체 어떻게 찾아온 것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잠뜰이 여전히 침묵을 고수하자, 가늘게 눈가 좁힌 각별이 제 품 속을 뒤적거린다. 이것까진 안 꺼내려고 했는데 말이야... 철컥, 소름끼치는 금속음과 동시에 잠뜰의 머리위로 차가운 감촉이 닿아온다. 잠뜰은, 이것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똑바로 대답하는 게 좋을텐데? 서늘한 목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하아, 잠뜰에게서 작은 한숨이 터져나온다. 자연스레 제 머리위로 딱 붙어 있는 금속을 손으로 단단히 틀어잡은 잠뜰이, 그대로 날카로운 시선을 쏘아붙인다. 각별씨,
" 아까부터 뭐하시는 거예요? "
잠깐의 정적, 얼마 지나지 않아 으흐흐. 그제야 각별에게서 이상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거 말이지, 기자 양반하고 한 번 쯤 해보고 싶었거든. 탕! 비비탄 총의 폭발음을 신호탄으로 방 안의 불빛이 환하게 밝혀진다. 드륵, 각별이 익숙한 듯 잠뜰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어, 껄렁한 자세로 손에 턱 괸 각별이 특유의 괴짜스런 웃음을 지어보인다.
" 그래서,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여기까지 오셨나? "
지켜낸 것
pg.437
달칵, 경쾌한 녹음의 시작음과 함께 까만 액정 위로 숫자가 떠오른다. 1, 2. 하나 둘씩 올라가는 숫자 가만 쳐다보던 잠뜰이, 이어 작은 녹음기를 각별과 제 중간에 내려놓는다. 자연스레 시선 옮기면, 각별이 신기한 듯 그 모습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잠뜰이 티나지 않을 정도로 작은 한숨을 내쉰다.
"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
" 어떻게 지내긴, 그냥 흐르는 대로 사는거지. 별 거 안 해. "
" 그럼, 제 연락은 왜 다 씹으셨는데요? "
따지듯 묻는 질문에도 각별에게선 진지한 기색이라곤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었다. 한결같이, 껄렁한 태도로 어깨나 으쓱거린 각별이 노랑빛 눈을 데구르 굴려댄다. 기자 양반, 말쏨씨는 어디 안 갔군. 톡톡, 두들기던 손가락이 네모낳게 뚫린 반투명한 유리창에 문득 고정된다. 옅게 찌푸려진 미간, 어디 줄초상이라도 난 듯 심각한 얼굴인 와중에도 또렷하게 빛나고 있는 회색빛 눈동자. 그런 것들이, 유리창 위로 그대로 떠올라 있었다. 큭큭, 각별이 작은 웃음소리를 흘려댄다.
" 어차피, 이렇게 흘러가다 보면 만나잖아? "
제 기다란 머리칼 베베 꼬아대던 손이, 그대로 잠뜰을 가리킨다. 이어, 곧게 뻗은 검지는 스스로에게로 향한다. 잠뜰과 각별 번갈아 가며 가리킨 각별이 마지막으론 하늘, 정확히는 천장을 가리켰다. 그리고,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잖아? 그 뒤로 생략 된 말이 무엇인진 확실했으나, 잠뜰은 구태여 캐묻진 않았다. 어쩐지, 벌써부터 기운을 다 빼앗겨 피곤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창 기자 일을 할 때는 며칠씩 밤새도록 밖에서 취재를 위해 대기해도 전혀 지치지 않았는데, 눈앞 이사람은 고위 정치인들을 상대 할 때보다 몇 배의 기력을 필요로 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 전부 예상 할 수 없이 괴상한 사람이었다.
각별, 나이 불명. 직업 불명, 출신지 불명. 그 전쟁통에서 도대체 어떻게 물자를 수급해 오는 것인지, 보부상이라는 이름을 달곤 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아도 대강 물건을 교환해 주는. 그럼에도, 꼭 중요한 무언가는 내어보이지 않는. 호구인지 아닌지, 영 알 수 없는 애매한 사람. 각별의 대한 잠뜰의 인상은 딱 그정도였다. 괴짜, 기자 일을 하며 수도 없는 사람들을 만나왔지만 각별은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괴상함의 소유자였다. 하아,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옅은 한숨이 새어나온다.
" 각별씨는, 정말 한결 같으시네요. "
그쪽도 마찬가지야, 키득 거리는 각별의 웃음소리가 선명하게 울려퍼진다. 잠뜰이 그것을 빤히 응시했다. 잠깐인가 공중에서 교차하던 시선이, 일순 미묘하게 엇갈린다. 도륵, 굴러가는 노랑빛 눈동자 때문이었다.
" 그쪽이 쓴 책, 나도 읽어봤어. "
영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깜빡, 예상치 못 한 말에 회백색 눈동자가 빠른 속도로 끔뻑거린다. 아주 거창한 이야기를 적어두셨던데? 전쟁의 우울감. 비참한 이야기, 아주 명필이었어. 나도 눈물 좀 찔끔 흘렸다고. 키득 거리는 목소리의 진정성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가자미 눈 한 잠뜰이, 조금 쏘아보자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건지 각별이 머쓱하게 헛기침이나 몇 번 해댔다. 뭐, 아무튼...
"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
그쪽, 지금 무슨 생각 하는지 얼굴에 다 드러나니까. 예민한 기자의 감은, 순식간에 그 속에 들어 있는 말의 의미까지 파악한다. 미묘하게 피하고 있는 시선, 웃고 있으나 가라앉은 목소리. 가만히 두지 못 하고 불안하게 책상을 두들기는 손가락 같은 것.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지금이라면 분명 가능 할 것이다. 몇 십년간, 온 몸의 감각이 그렇게 말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전부터 묻고 싶었던 단 하나의 질문, 잠뜰이 그것을 다시 꺼내 놓는다. 그럼, 각별씨는.
" 후회 같은 거 안 하세요? "
까딱, 한 번 들어 올려진 굵은 눈썹이 곧장 장난스레 구겨진다. 후회?
" 그딴 거, 당연히 안 해. 죄책감 따위도 안 가져. "
당연하잖아, 그 당시엔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고. 그렇게 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은 비겁한 거지, 남의 희생 위에 서놓고 혼자만 깨끗하게 굴었다는 거니까. 전쟁 중에 깨끗함은 기대 할 수 없어, 타인에게 상처 하나 남기지 않을 각오로 스스로의 목숨을 구걸하는 건 비겁한 짓이야. 지키고자 하는 생명이 있다면 더더욱, 많은 이의 것들을 빼앗을 각오 정도는 해야 하지. 막힘없이 흘러 나오는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기지 않는다, 마치 당연한 사실을 읊듯 평온한 목소리. 잠뜰은 그 모든 것을 말 없이 가만 응시한다. 누군가를 상처 입혀서라도, 지켜야 할 목숨.
" 그리고, 그걸로 지켜냈다면. 충분한 거고. "
그제야 잠뜰은, 작은 이해를 거친다. 각별의 괴상한 행동 뒤편에 숨어 있던, 지극히 인간적인 마음. 괴짜같은 행동 뒤로 감춰져 있던, 다른 이들과 다를 바 하나 없는 지키고자 했던 마음을. 또 다시 조용한 정적이 둘 사이를 가득 채워낸다. 또렷한 회백색 눈동자는, 여전히 올곧게도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전부터 느낀거지만, 저 눈빛은 영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곤 했다. 또 다시 도륵, 각별이 시선을 피하려던 순간이었다.
" 그럼, 저한테 도움을 주신 이유는요? "
이전부터 묻고 싶었던 단 하나의 질문, 각별은 타고난 장사치였다. 그렇기에, 말을 잘 하는 걸로 따지자면 각별 쪽도 만만치 않았다는 이야기다. 기자의 말재주를 사용 할수록, 잠뜰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각별이 정말로 자신의 말에 넘어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저 그런 척. 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이어 각별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끔뻑, 몇번인가 당황으로 깜빡이던 눈동자가 일순 아주 짙은 장난기를 드러낸다.
" 재밌잖아? "
깜빡, 예상치 못 한 대답에 맹한 표정을 띄워낸 잠뜰을 각별이 가만 응시했다. 그런 전쟁통에서도, 집 하나 얻어서 어떻게든 살아내겠다는 꼴도. 제 한 몸 건사하기 바쁜 와중에도, 어린아이 약자 가릴 것 없이 들여보내는 것도. 물자가 부족할 것이 분명한 상황에도, 나누는 것을 아끼지 않는 점도. 그러면서도, 타인의 것을 빼앗는 모순적인 점까지. 각별이 바라봐 온 잠뜰은, 지나치게 이질적인 사람이었다. 생존을 위해 무엇이든 할 것처럼 군 것 치곤, 종종 보이는 면들은 지나치게 나약했다. 그저 무시하면 훨씬 더 풍족하게 살 것을, 자신의 것까지 내어주며 누군가를 구한 건 포기하지 못 한 인간성인지. 혹은, 그저 확인받고 싶은 다정이었는지. 각별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런 잠뜰의 생존을 지켜 보는 건 꽤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 장사꾼들은, 발 뻗을 곳을 알아보는 법이거든. "
씨익, 각별 특유의 웃음이 얼굴 위로 가득 떠올랐다. 실제로, 각별은 잠뜰을 도운 대가로 목숨을 구제 받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 그 이전에 행했던 모든 투자들은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확신은 없었으나 시도해 보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목숨값으로 고작 물자 몇 개라니, 지나치게 싼 값이었다.
" ...정당한 거래, 였다는 말이네요. "
그제야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잠뜰이, 어쩐지 잔뜩 김빠진 듯 푸욱 깊은 한숨을 내쉰다. 처음부터, 전부 계산 되어 있었다는 말인가. 각별은 주변의 적이 많았다, 그런 세상에서 물건을 사고 판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물자가 급한 사람들은, 상대를 총과 칼로 위협해서라도 물건을 얻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잠뜰은, 총과 칼을 들이미는 법이 없었다. 상대를 설득하려, 말을 사용하는 모습. 그건, 전쟁통에선 보기 드문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각별은 깨달은 것이다. 각별이 위험에 처한다면, 잠뜰은 결국 무시하지 못 할 거라는 사실을. 또, 구해낼 것이라는 사실을. 보부상의 감이라는 건가, 반쯤 포기한 듯 찌푸려진 회백색 눈동자가 눈앞 상대 날카롭게 노려보자. 까딱, 각별의 굵은 눈썹이 한 번 더 들썩거렸다. 이어, 개구지게 휘어지는 눈가에는 어쩐지 즐거운 듯한 웃음이 묻어나왔다.
" 당연하지, 난 손해 보는 장사 따윈 안 해. "
-
" 자, 받아. "
휙, 문을 나서던 잠뜰에게로 불쑥 작은 물건 하나가 던져졌다. 얼떨결에 그것 받아낸 잠뜰은, 이어 손에 쥐여진 물건에 곧장 표정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 내가 이제 물건을 파는 장사치는 아니지만,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이정돈 내어 줄 수 있지. "
선심 썼다는 듯, 아주 뻔뻔스레 웃어 보이는 각별의 모습에 잠뜰의 표정은 점점 더 썩어 들어갔다. 잠뜰의 손 위에 쥐여진 그것, 손가락 한 마디 크기는 될까 싶은 아주 짧둥한. 연필 한 자루. 각별이 던진 것은, 글씨를 쓰기도 어려울 정도의 다 닳은 연필이었다. 한참 조용히 각별을 노려보던 잠뜰이 작게 고개나 휘저었다.
" 진짜 아무거나 주시네요. "
쓰읍, 아무거나라니. 이번엔 각별이 날카로운 눈초리를 해댔다. 아주, 진지한 얼굴 표정과 목소리를 내고서는. 손가락 다섯개를 쫙, 펼쳐 보인다.
" 무려, 우리 조카가 다섯달에 걸쳐 만들어 낸 걸작이라고. "
버리지 말고, 소중하게 간직하쇼? 각별이 또 다시 키득거리는 웃음 소리를 흘렸다.
" 이건 공짜 맞죠? "
장난스레 던져진 잠뜰의 질문에, 각별은 한참이나 고민하듯 작은 비음을 흘려댔다. 음...... 이게 심각하게 고민 할 문제인가? 떠오르는 의문은 있었으나 잠뜰은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글쎄? 그건 그쪽한테 달렸지. 장난스레 올라간 눈고리, 들썩이는 무게 따윈 없어 보이는 어깨. 한결같이 변함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더이상 보이지 않는 붕대나, 높게 틀어묶은 머리칼이나. 몇 배로 깔끔해진 복장 같은 것들은, 이전과 똑같다고 하기엔 어려운 감이 있었다. 그 모습 가만 응시하던 잠뜰 또한, 결국엔 한숨같은 웃음을 흘린다.
-
잠뜰이 다시 바깥을 나섰을 땐,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한 건지 하늘이 온통 붉은 빛이었다. 다 지기 시작한 태양빛에, 잠뜰이 작은 연필 한 자루를 들어 올렸다.
" 지켜낸 것... "
그 전쟁이 계속 됐다면, 그와중에 놓치고 말았다면. 분명 이 작은 연필같은 건 존재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잔잔하게 들리는 이 웃음소리 같은 것도. 잠뜰의 입꼬리가 부드러운 호선을 띄우고 올라간다. 옮겨지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 아줌마! "
잠뜰이 문을 완전히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익숙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잠뜰의 고개가 자연스레 돌아간다. 아줌마라는 소리에 돌아버린 것은, 어쩐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지금와서야 별로 상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 다음에 또 봐요! "
작은 아이 두 명이, 아주 신나서는 손을 붕방붕방 흔들어 댄다. 잠뜰이 그 모습을 가만 응시했다. 부드러운 바람이 갈색빛 머리칼을 마구잡이로 스치고 지나가고, 눈에 담기는 모든 풍경들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교복을 입은 아이둘, 걱정이나 근심 따윈 아무것도 찾아 볼 수 없는 해맑은 얼굴. 처음 마주쳤을 땐, 둘 다 아주 세상 다 산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 저 둘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건, 오직 어린아이 특유의 순수함 뿐이었다. 어쩌면, 그 사람들은 저 얼굴 표정을 지키고 싶었떤 걸지도 모른다. 잠뜰이 천천히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불투명한 렌즈 틈으로, 아주 선명하게 웃는 얼굴이 담긴다. 픽, 끌어 올려지는 입꼬리 틈으로 참아내지 못 한 웃음 같은 것이 비죽 튀어나왔다.
#05
-다섯 번째 약속
" 꺄아악! "
날카로운 비명소리,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던 잠뜰의 발걸음이 그대로 그 자리에 굳어버린다. 거의 반사적으로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돌리자, 날카로운 철이 햇빛을 반사해 절로 두 눈이 찌푸려졌다. 찌푸렸던 눈을 겨우 떠내면 아마도 소리를 내지른 장본인, 아주 작은 아이 하나가 웬 거무칙칙한 남자에게 붙들린 채로 오들오들 떨고 있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날카로운 칼 끝이, 금방이라도 아이의 살을 파고들 듯 위태로운 기색이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본능적인 예감이 들었다, 이대로 가만히 지켜만 본다면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재빨리, 제 품 깊숙한 곳으로 손을 찔러넣는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구비해 둔 작은 단검의 손잡이가 손 끝에 걸렸다. 어쩐지, 절로 손에 송글송글 식은땀이 맺히는 기분이었다. 꿀꺽, 침 한 번 삼킨 잠뜰이 단단히 칼의 손잡이 부분을 틀어 잡았다. 수도 없이 휘둘러왔었다, 이제와서 새삼스러울 이유도 없다.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반복적인 다짐을 하며, 앞으로 한 발 내딛으려는 순간. 타닥, 거친 발돋움 소리와 동시에 붉은 머리칼이 순식간에 시야를 가득 채운다. 잠뜰의 회백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확장된다. 총알처럼 재빠른 몸짓, 붉은 태양보다 더 새빨간 머리칼. 우당탕, 거친 소음과 함께 단숨에 상황은 종결 되었다.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뒷쪽에서 튀어나온 붉은 형체는 손쉽게 눈앞 괴한을 제압하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 냈다. 새파란 하늘 아래, 새빨간 사람. 지독하게 익숙한 이의 얼굴. 잠뜰의 얼굴 위로 옅은 웃음 같은 것이 떠오른다.
" 라더씨, "
철컥, 그때까지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빨간 형체는 그대로 괴한의 손목에 차가운 수갑을 채워넣었다. 이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번쩍 들어 올려진 얼굴. 떠올라 있던 험상궂은 표정이 순식간에 반가움으로 변질 된다. 여러번 봐 온 광경이지만, 순식간에 바뀌는 표정은 볼때마다 신기한 구경이었다. 오른쪽 팔 번쩍, 들어올린 라더가 반가운 듯 손을 마구잡이로 흔든다.
" 잠뜰씨! "
변하지 않는 것
pg.514
" 라더씨는 여전히 정신 없네요. "
큭큭, 잠뜰이 작은 웃음소리를 흘리면 머쓱한 듯 볼 긁적거린 라더가 작은 머그잔 하나를 잠뜰의 앞에 내려 놓는다. 어쩔 수 없죠, 전쟁이 끝났다고 범죄가 끝난 건 아니니까요. 덧붙이듯 전해오는 말에는, 진지한 기색이 역력하다. 모락모락, 따듯한 김이 피어오르는 새까만 물. 커피구나, 잠뜰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끌어 올려졌다. 아무리 그래도,
" 그런 식으로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요. "
라더와의 약속 시간은, 앞으로 1시간 뒤. 라더를 만나기 전 가볍게 산책이나 할 겸 나섰던 길에서, 그대로 라더와 마주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 했었다. 그것도, 그런 특수한 방식으로. 그에 어깨나 한 번 으쓱거린 라더가, 자연스레 잠뜰의 앞에 자리 잡았다. 달그락, 탁자 위로 올려지는 또 다른 머그컵엔 마찬가지로 따듯한 커피가 담겨 있었다. 그 모습 가만 바라보던 잠뜰이 홀짝, 커피를 한 모금 삼킨다. 고급진 커피의 맛은 아니었지만, 적당히 씁쓸한. 이전까지의 것들과 비교하면 아주 훌륭한 커피였다, 어쩐지 편안해지는 기분에 잠뜰의 얼굴 위로 한결 부드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새빨간 눈동자가 그것을 묘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 잠뜰씨는, 여전히 커피를 좋아하시네요. "
이번엔 잠뜰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전쟁이 끝났다고, 사람의 호불호가 바뀌진 않으니까요. 픽, 잠뜰의 대답에 라더에게서 짧은 헛웃음 같은 것이 새어 나왔다. 빙글, 맛 좋은 커피의 맛에 한결 기분이 나아진 잠뜰이 가벼운 손길로 녹음기의 시작 버튼을 누른다. 새까만 액정 위로, 또 다시 시간을 세는 숫자가 떠오른다. 도륵, 굴러간 회색빛 눈동자가 벽면 한 쪽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한다. 음, 작은 고개 끄덕임.
" 조금 이르긴 하지만, 시작할까요? "
-
사각 거리는 펜의 소리, 타닥거리는 자판의 소리. 어디선가 조곤조곤한 통화의 소리가 들려오고, 째깍거리는 시계의 초침은 일정하다. 평화롭다기엔, 어딘가 긴장감이 가득한 공간. 잠뜰의 시선이 천천히 주변을 살핀다. 경찰서의 내부에 직접 들어오는 건, 몇 번을 경험해도 어쩐지 생경한 기분이었다. 딱히, 찔리는 건 없지만. 그래, 찔리는 건 없다. 그저, 조금 생경한 기분이 들 뿐이었다. 누군가에게 하는지도 모를 변명을 괜스레 내뱉자면, 눈앞에 따라붙는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모든 것 태워버릴 듯, 아주 새빨간 눈동자. 빙긋, 잠뜰이 얼른 표정 갈무리하곤 기자 특유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라더, 정의로운 경찰. 전쟁 중에도, 신념을 지키고 사는 조금은 미련한 사람. 그 상황에서도, 사람들을 구하다 자신의 목숨을 내버릴 정도로. 잠뜰과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쉘터 속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도덕이나 명예 같은 것 진즉 내버릴 때도. 설령 죄책감을 느끼더라도, 살기에 급급했기에 외면하던 그 순간에도. 라더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한다. 그것이 비겁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라더는, 자신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을 테니까. 경찰이라는 이유로 털지 못 했던 집도, 경찰이라는 이유로 부상을 입었던 팔도. 그런 흔적들은, 그가 비겁하다고 얘기하기엔 불충분한 증거였다. 그러니, 라더가 이곳에서 또 다시 누군가를 지키고 있는 모습은. 솔직히 말하자면,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그러니, 그에게 던질 질문 또한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까딱, 손에서 펜이나 몇 번 굴리던 잠뜰이 노트의 구석 위로 낙서 같은 것을 끄적였다. 생각 정리를 위함이었지만, 복잡한 머릿속은 영 시원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라더씨, 일은 어때요? "
새빨간 눈동자가 두어번 정도 빠릿하게 끔뻑거린다. 이어, 고민하듯 기울여지던 고개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똑바로 잠뜰을 마주 본다.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또렷한 눈빛의 눈동자는 어쩐지 묘한 확신까지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 당연히, 겁나 힘들죠. "
이번엔 잠뜰의 눈동자가 빠릿하게 끔뻑거린다. 예상했던 답변과는 완전히 다른류의 대답이었던 탓이다. 잠뜰이 예상했던 라더의 답변은, 뭐 그냥 흔해빠진 거였다. 뿌듯하다던가, 매일매일 즐겁다던가. 하지만, 눈앞에 라더는 어쩐지 질렸다는 듯 잔뜩 미간까지 찌푸려대고 있었다. 그런 잠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삐죽 튀어나온 라더의 입술에선 쉬지도 않고 불평의 말들이 튀어나온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업무들은 전보다 훨씬 늘어났는데, 갈수록 인력은 줄어들지. 다들 불법으로 소지한 무기를 내놓질 않아서(잠뜰은 어쩐지 가슴 언저리가 따끔거렸다.) 위험도는 늘어났지. 매일매일이 완전 전쟁이라니까요! ......음, 그렇죠. 잠뜰이 할 수 있는 대답은 그게 다였다. 아무리 세상에 즐거운 일은 없다지만, 라더조차 이런 대답을 내놓다니. 조금은, 쇼크. 덕분에 능숙한 기자의 말빨 같은 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 가만 응시하던, 라더가 불쑥 작은 웃음 소리를 흘린다. 뭐, 여전히 전쟁 같은 삶이죠. 하지만...
" 나쁘진 않아요. 상처 입히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위한 전쟁이니까요. "
이번에도 쓸데 없다고 하실 거죠? 일순, 입술 비죽인 라더가 괜시리 작은 투정을 부렸다. 도륵, 굴러가던 회백색 눈동자는 과거의 파편을 어렵지 않게 떠올려 낼 수 있었다. 그 당시, 라더는 지나치게 빡빡하게 굴곤 했다. 당장 생존이 급급한 상황에, 신념이니 정의니 그딴게 도대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렇기에, 그를 향한 작은 원망 같은 것도 분명 존재는 했었다. 때로는, 그 답답한 정의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따져 묻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 그 생각은 여전히 변함 없어요. 그래도... "
자기 신념 지키며 사는 것도 나쁘진 않죠. 잠뜰의 대답에 씨익, 그제야 라더의 얼굴 위로 쾌활한 웃음이 떠올랐다. 몇 년 전 보이던, 그 웃음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얼굴. 느릿하게 두 눈 끔뻑이던 잠뜰이 결국엔 마찬가지로 작은 웃음 소리를 흘린다. 바로 이런 점이, 라더를 도저히 미워 할 수 없는 이유였다. 라더의 정의는, 지나치게 확고한 동시에 반짝 거렸으니까. 아무리 절망과 좌절로 가득한 세상이어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이었다. 직업 의식, 윤리와 도덕. 사회의 법, 그런 것들 전부 의미 없는 세상에서도 그런 쓰잘데기 없는 것들을 지키려는 사람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것을, 누가 감히 잘못 됐다 말 할 수 있을까. 그런 선의가 없었다면, 이곳에 살아 있지 못 했을 사람 또한 많았다는 건 부정 할 수 없었다. 잘 보이진 않아도, 그 틈으로 분명한 굳건한 마음 같은 것들이 존재했다. 눈앞에 이 사람은, 그걸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무언가의 확신을 받은 듯한 기분, 직전까지 불안했던 마음들은 순식간에 안정 된다. 생생하게 변하는 잠뜰의 표정을 붉은 눈동자가 가만 응시한다. 잠뜰씨,
" 이게 뭔지 아세요? "
회백색 눈동자가 빠르게 끔뻑거린다, 이어 내밀어진 것의 정체 살피려 정신없이 움직이는 눈동자. 불쑥, 눈앞에 내밀어진 것은 코팅된 말린 낙엽이었다.
" ...낙엽이네요. "
" 책갈피예요. "
책갈피요? 되묻는 잠뜰의 질문에, 라더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휴전 선언이 울려퍼졌던 날, 처음 봤던 길거리의 낙엽으로 만든 거예요. 잠뜰이 그것을 가만 응시하자, 붉은 빛 눈동자가 느릿하게 굴러간다. 창문 틈으로 새어들어오는 햇볕,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히 따듯한 온도. 또 다시 발동한 기자의 감, 회백색 눈동자가 곧장 날카롭게 구겨진다. 지금은 분명 적절한 이야기를 들을 타이밍이었다.
" 잊고 싶지 않았거든요. "
중얼거림에 가까운 목소리였으나, 잠뜰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또렷한 눈동자로, 시선 맞추면 라더가 또 한 번 가볍게 어깨나 으쓱였다. 전쟁 속에서, 제가 했던 모든 일들을요. 잠뜰씨 앞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저, 나름대로 죄책감에 시달렸거든요.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경찰이 됐는데. 이렇게 남들을 상처입히고 살아남아도 괜찮은 건가? 처음엔,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그저 기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세 불안해 지더라고요. 그렇게 애써 지켜왔던 신념도, 명예도 이미 저에겐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요.
" 그래서, 전부 그 책갈피에 담았어요. "
과거의 죄악도, 느꼈던 감정도. 슬픔도, 전부요. 잊지 않고, 기억하려고요.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삶에서, 새롭게 쌓아나갈 모든 순간들에서. 제가 했던 것들을 잊지 않고, 제대로 기억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이 목숨의 무게를 느낄 수 있도록. 제 가슴께로 손 올린 라더가, 무언가 결심한 듯 굳은 표정으로 옷깃을 꽉 쥐었다. 순식간에 주름지는 옷자락을, 잠뜰은 아무말 없이 응시한다. 그러면 문득, 시선 맞춰 온 라더의 눈가가 장난스럽게도 휘어접힌다. 이거,
" 잠뜰씨 줄게요. "
잠뜰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라더는 잠뜰의 앞에 코팅 된 낙엽을 내려놓았다. 새빨간색을 가진 것이, 라더의 눈동자와 꼭 닮아 있었다. 여전히 상황 파악 덜 된 잠뜰이 그것을 가만 내려다 본다.
" 그래도 괜찮아요? "
" 네, 이젠 잠뜰씨한테 더 필요할 것 같고... "
전, 이미 다른 책갈피도 많이 생겼거든요. 정갈하게 늘어놓은 책갈피 들여보인 라더가, 아주 시원스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코팅 된 낙엽 위로, 쓰여있는 글자들을 훑자면 이 낙엽들의 출처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라더씨, 고마워요! 정갈한 글씨체로 휘갈겨진 것부터, 경찰 아저씨 감사합니다! 삐뚫빼뚫, 서툰 솜씨로 열심히 쓴 태가 나는 글씨까지. 제각각의 마음이 담긴 책갈피, 그가 살아온 삶이 어떤 모습을 띄고 있었는지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라더가 피워낸 새로운 평화들은 그곳에 분명하게 담겨 있었다. 눈앞에 놓여진 빨간 나뭇잎, 꼭 사람의 새빨간 피를 닮은 그것. 하지만, 실제 피의 색은 훨씬 더 탁하다. 이렇게 새빨간 빛은, 피보단 열심히 움직이는 저 붉은 머리칼과 닮아 있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언제나 존재했다.
" 그거, 저보고 죄책감 좀 가지라고 눈치 주시는 거죠? "
툭, 장난스레 던진 말에 새빨간 눈동자가 곧장 동그랗게 확장 됐다. 이어, 장난스레 구겨지는 얼굴 표정까지. 설마요, 키득거리는 목소리를 끝으로 잠뜰은 빼곡하게 질문이 적혀 있는 노트를 그대로 덮어버린다. 꾹, 빨간 버튼을 누르자 녹음기 위로 떠올라 있던 숫자 또한 그대로 멈춰 버린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맹한 표정의 라더는 몇 번인가 눈이나 끔뻑였다. 픽, 또 한 번 작은 웃음 새어나온 잠뜰이 그대로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 끝인가요? "
" 네, 여기 계속 있다간 감옥에 갇힐까봐 무섭거든요. "
어깨 한 번 더 으쓱인 잠뜰이, 여전히 김이 모락거리는 커피를 단숨에 들이킨다. 그러곤,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조금 낡아빠진 가방을 어깨에 둘러맸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잠뜰을, 그때까지도 멀뚱히 쳐다만 보던 라더가 다급하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순간.
' 찰칵 '
카메라의 셔터음. 그대로,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버린 라더의 표정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잠뜰에게서 맑은 웃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 라더씨, 지금 표정 끝내주는데요? "
표지로 쓰면 딱이겠어요, 만족스러운 듯 고개 몇 번 끄덕거린 잠뜰이 재빠르게 밖으로 빠져나간다. 깜빡, 깜빡. 두어번의 끔뻑거림, 이어 상황 파악 끝마친 라더의 표정이 금세 험상궂게 구겨진다. 재빠른 발걸음이, 순식간에 멀어졌던 뒷모습을 따라잡는다.
" 잠뜰씨! "
이크, 귓가에 때려박는 우렁찬 목소리에 빠르게 걸음 재촉하던 잠뜰이 문득 뒤로 돌아선다. 양 손을 크게 벌리고, 힘차게 흔들며. 언젠가 누군가 자신에게 했던 인사법, 그대로. 라더씨,
" 다음번엔 순진하게 속지 마세요! "
그대로 도망치듯 멀어지는 잠뜰의 뒷모습 가만 응시하던 라더는, 결국 한숨 같은 헛웃음을 터트리고야 만다. 정말, 한결같다니까.
" 다음번인가... "
봄 기운 가득 담은 바람은 따듯하다. 공중을 잔뜩 나부끼는 갈색빛 머리칼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라더가 작게 고개나 휘저었다. 삐릭, 앞주머니에서 들려오는 짧은 호출 소리. 그때까지도 얼빠진 표정이던 눈가가 금세 날카롭게 빛을 낸다.
#06
-여섯 번째 후회
" 정씨? 그 사람, 여기 더 이상 안 나와. "
네? 충격적인 소식에, 잠뜰은 순간적으로 제가 들고 있던 카메라를 땅바닥에 떨어트릴 뻔했다. 이제는 완전히 낡아버린 간판 에는, '디노 수리공'이라는 아주 구린 이름이 적혀 있었다. 쉘터에 처음으로 입주했던 수리공, 공룡의 공방이었을 것이 확실한 이곳. 며칠전 약속을 잡을 때까지만 해도, 그런 기색은 조금도 없었는데. 약속 시간에 맞춰 도착한 잠뜰에게 처음으로 들린 소식은, 공룡의 반가움 가득한 인사가 아니라 더이상 공룡의 부재 소식이었다. 그것도, 일방적인 이별 선고에 가까운 소식.
-
훅, 끼치는 향긋한 꽃향기와 그 사이로 상쾌하게 섞여드는 풀내음. 이전에 진득하게 베어 있던 화약냄새도, 쇳내음도 이제는 찾아 볼 수조차 없었다. 먼지가 자욱하게 올라오던 집구석이 아니라, 잘 관리되어 반짝거리는 빛을 내는 작은 화원. 새하얀 프레임, 그 사이사이에 세워져 있는 투명한 통 유리창들은 한없이 따듯한 햇살을 전부 그대로 받아낸다. 그 한가운데에서, 질린 표정을 지은 잠뜰이 짧은 한숨을 내뱉는다.
" 공룡씨, 직장 바뀌신 걸 안 알려주시면 어떡해요? "
잔뜩 불퉁한 목소리에, 초록빛 풀숲 사이로 마찬가지로 녹음빛 잔뜩 받은 초록빛 후드자락 하나가 튀어나온다. 빼꼼, 튀어나온 고개 위로는 지나치게 익숙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깜빡깜빡, 잠뜰을 발견하고도 몇 번인가 맹한 채 두 눈만 끔뻑거리던 형체가 곧 무언가 깨달은 듯 두 눈이 둥그렇게 확장된다. 아, 이런.
" 까먹었다. "
태평스레 내뱉는 말은 퍽, 얄밉다. 곧장 날카롭게 구겨진 잠뜰의 얼굴 발견한 공룡이, 능청스레 눈가를 접어 올렸다.
" 그래도 잘 찾아오셨으니 된 거 아닌가? "
...죄송한데요, 공룡씨. 일단 한 대 맞고 시작하시죠, 불끈. 주먹 쥔 잠뜰이 매서운 기세로 공룡의 코앞까지 다가선다. 푸드덕, 갑작스레 울려퍼지는 비명 소리에 새들이 재빨리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나아가는 길
pg.756
" 어때, 요즘엔 카페인 중독은 좀 해결 되셨나? "
달각, 잠뜰의 앞에 새까만 블랙 커피 내려 놓은 공룡이 장난스레 말을 덧붙였다.
" 아뇨, 여전해요. 공룡씨는... "
알코올 중독은 이겨내셨고요? 데룩, 굴러가던 회백색 눈동자가 마찬가지로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를 흘린다. 데룩, 한 번 구른 새까만 눈동자가 곧장 자신만만한 표정을 그려낸다.
" 그으~럼!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
" 그럼, 저기 쌓여있는 맥주캔들은요? "
슬쩍, 아까부터 새파란 화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존재감을 내뿜는 알류미늄 캔들을 가리킨다. 자연스레 잠뜰의 손 따라 시선 흘리던 공룡이, 곧장 상큼한 윙크를 날려댄다.
" 그런 사소한 건, 넘어가자고. "
네네, 그러시겠죠. 건성으로 대답한 잠뜰이 절레 고개나 휘젓는다. 스스로도 카페인 중독을 해결하지 못 했으니, 할 말은 없었지만. 지금도 제 앞에서 당당하게 맥주캔을 뜯으며 할 말은 아닌 듯 싶었다. 달칵, 경쾌한 소리와 함께 보글보글 하얀 거품이 떠오른다. 그대로 몇 모금 삼켜낸 공룡이 키야, 하며 작은 감탄사를 내뱉는다. 그 모습을 회백색 눈동자가 가만 응시했다.
-
쉘터는, 좋게 말해도 풍족한 상황은 아니었다. 물자는 언제나 부족했고, 설치 된 대부분의 기구들은 전문 지식 하나 없이 엉성한 일반인의 실력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만들어 낸 알코올 따위가 제대로 된 맛을 낼리가 없었다. 알코올도 마찬가지였다. 공룡이 하도 맛있게 마셔대는 통에, 살짝 맛을 봤던 잠뜰은 그대로 인상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살짝만 맛을 본 것 뿐이었는데, 곧장 눈앞에 빙글빙글 돌았고. 머리까지 지끈 거리는 것이, 아무리 봐도 멀쩡한 알코올은 아니었다.
" 아니, 이딴 걸 왜 먹고 있어요. 아저씨! "
기겁한 잠뜰이 다급하게 공룡의 손에 들린 유리병 빼앗아 들자, 알코올에 취한 것인지 뭔지. 헤실헤실 웃음소리나 흘려대던 공룡이 다시 유리병을 빼앗아 들었다.
" 그런 걸, 그런 걸 알기 위해 마시는 거지! "
주정뱅이의 헛소리에 가까웠지만, 날카로운 기자의 감은 그당시에도 쉬는 법 따윈 없었다. 잠뜰은, 그 말을 하는 공룡의 새까만 눈동자 위로 가라앉아 있는 어렴풋한 감정을 분명하게 마주했다 이렇게 힘든 삶, 알코올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중얼거렸던 목소리를 기억한다. 답지 않게 가라앉아 있던 표정 같은 것들도, 전부. 도륵, 한 번 더 굴러간 회백색 눈동자는 순식간에 과거의 파편을 끄집어 냈다. 몇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맥주를 맹물처럼 들이키는 모습은 과거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공룡씨는 여전히...
" 사실 말이야, "
불쑥, 잠뜰의 회상을 깨고 장난스런 목소리가 들려온다. 잘 지내죠? 라는 메시지 하나만 띡, 왔을 땐... 드디어 올 게 왔구나~ 하고 각오를-
" 그거 무슨 뜻이죠? "
공룡의 목소리와 표정 그득그득하게 묻어나는 장난기를 인식한 잠뜰의 눈가가 금세 매섭게 구겨진다. 큭큭, 여전히 기분좋은 웃음소리 흘린 공룡이 괜히 눈이나 한 번 데룩 굴렸다. 톡톡, 두들기던 알루미늄 캔을 한 번 쓸어내리더니 묘하게 뒤로 몸을 물린다.
" 잠뜰씨가, 그 흉포한 성격을 참지 못 하고 드디어 누구가를 폭행하셨구나- "
휘익, 공룡이 미처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꽉 쥔 주먹이 얼굴 코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 뒤로 몸을 빼지 않았다면 분명히 직통으로 맞았을 것이다. 천재같은 자신의 판별력에 감탄하며, 공룡이 능청스레 어깨나 으쓱였다. 밝은 미소를 띄우는 것도 잊지 않은 채다. 그래, 웃는 얼굴엔 침 못 뱉는다지 않던가?
" 표정이 심각해 보이시길래, 웃자고요. "
멈칫, 그 말에 매섭게 구겨져 있던 잠뜰의 얼굴이 미묘하게 풀린다. 역시, 진심은 통하는 법이다. 공룡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공룡씨, 잔뜩 감동 받은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이어, 퍽. 둔탁한 효과음과 함께 공룡은 그대로 제 이마를 쥐어잡는다. 악! 뭐하시는 거예요? 반쯤, 바닥에 쓰러진채로 항의하면. 빙긋, 그린듯 맑은 웃음을 띄운 잠뜰이 일어나라는 듯 손을 내밀어 왔다.
" 공룡씨는, 항상 쓸데없는 말이 참 많아요. "
그쵸? 부드러운 목소리의 질문이었지만, 어쩐지 그것은 닥치라는 협박에 가깝게 들렸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새까만 눈동자가, 결국 목숨을 건 수다 대신 침묵을 선택한다.
-
달칵, 익숙한 손길로 빨간 버튼 누르면 검은 액정 위로 숫자가 떠오른다.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린 잠뜰이, 탁자 가운데에 기다란 녹음기를 올려두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때까지도 공룡은 침묵을 유지한 채였다. 홀짝, 커피의 맛은 아주 진했다. 고급 원두를 사용한 것인지, 혹은 직접 글라인더로 갈아내린 것인지. 맛의 풍미가 나쁘지 않았다, 여전히 쭈그려져 눈치를 보는 사람에게로 회백색 눈동자가 데굴 굴러간다. 뭐, 커피 맛도 좋고. 슬슬 봐줄까. 공룡씨,
" 이제 수리공 같은 건 그만 두셨나 봐요? "
그제야 말 할 기회를 얻은 공룡의 표정이 금세 밝게 핀다. 봉인이 풀린 공포의 주둥아리는, 신명난 수다를 시작 할 기세로 입을 달싹거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 번 더 꾹 다물려 버린다. 이상함을 느낀 잠뜰이 한 쪽 눈썹 까딱 거리면, 공룡이 머쓱한 듯 제 볼을 긁적거렸다. 음,
" 영 그 때 기억이 안 떨쳐지더라고요. "
아하, 잠뜰은 그제야 위화감의 원인을 깨닫는다. 공룡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상태는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절뚝거리는 다리 하며, 군데군데 선명하게 새겨진 화상 자국. 이제는 그런 흔적들은, 아주 희미하게만 남아 찾아보기 어려웠으나. 마음속 깊은 곳에 새겨졌을, 또 다른 상처들은 여전히 그곳에 존재할 것이다. 공룡은, 쉘터 내에서도 유독 생각 없이 굴던 사람 중 하나였다. 정확히는, 그렇게 보이려고 부단히 애를 쓰고 노력하곤 했다. 의도적으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던져지는 농담이나, 장난스러운 행동들. 윤리를 저버리는 순간에도, 아무리 너덜너덜해진다 해도. 끝까지 잃지 않았던 웃음. 그 뒤에 억눌렸을 감정 같은 것들을, 잠뜰은 어렴풋하지만 확실하게 느끼곤 했다. 구태여, 그것을 파해치는 건 그 누구에게도 이득이 아니었기에. 그저 모른 척 넘겼을 뿐이었지. 잠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 그거, 아쉽네요. "
비꼼 하나 없는, 순수한 진심이었다. 공룡은, 꽤 실력 좋은 수리공이었다. 부족한 물자들과, 낡은 시설들로도 뚝딱뚝딱 물건을 만들어 내거나. 손쉽게 고쳐내곤 했다. 그런 공룡의 모습을 더이상 보지 못 하는 건, 어쩐지 아쉽게 느껴졌다. 흐응, 공룡의 눈썹이 가볍게 까딱거린다. 잠뜰의 표정을 살피는 새까만 눈동자가 금세 장난스럽게 구겨진다.
" 왜요, 뭐 수리가 필요한 거라도 있으신가? 잠뜰씨라면, 같이 이겨낸 전우의 의리로 하나 정도는 공짜로- "
" 아뇨, 아뇨. 괜찮아요. "
불쑥, 코앞까지 고개 들이민 공룡이 장난스런 웃음을 흘려댔다. 그것 한 손으로 막아낸 잠뜰이, 작으 한숨을 내뱉는다. 데룩, 굴러간 회백색 눈동자가 바닥의 무늬를 응시한다. 그냥...
" 그냥? "
갸우뚱, 의문을 드러내듯 공룡의 고개가 느릿하게 기울여진다. 잠뜰이 그 표정을 가만 응시했다.
" 잘 살고 계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
빙글, 잠뜰의 눈가가 금세 부드럽게 접혀 올라간다.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끌어 올려진 입꼬리는 퍽, 다정한 인상을 남겼다. 그에 공룡의 눈매가 날카롭게 구겨진다.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하기라도 했는지, 집요한 시선이 끈덕지게도 잠뜰에게로 따라 붙었다. 흐음...
" 잠뜰씨, 무슨 일 있죠? "
질문이라기보단, 거의 확신에 가까운 말이었다. 아뇨? 잠뜰에게서 반사적인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것이 의심을 가중한 것인지. 공룡이 연신 이상하다는 듯, 작은 비음을 흘린다. 흐음, 으으으음... 심각한 얼굴 되어선 한참이나 요리조리 잠뜰의 얼굴을 뜯어 살피던 공룡이 불쑥. 픽, 작은 비웃음 같은 걸 흘렸다. 거짓말.
" 그게 아니면, 잠뜰씨가 제 안부를 걱정 할 리가 없는데요? "
비꼬듯 장난스러운 목소리, 삐죽. 순간적으로 감정 드러낸 잠뜰의 입꼬리가 부들 떨린다. 공룡은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 농담이고, 잠뜰씨 표정 지금 완전 죽상이거든요? 안 어울린다구요. "
괜시리 입 몇 번 비죽거리던 공룡이, 이어 또 한 번 개구지게 눈꼬리를 접어 웃는다. 잠뜰씨는, 예전부터 조금 빽빽할 정도로 자신한테 엄격한 면이 있었으니까요. 또, 그런 쓸데없는 생각 때문이 틀림없죠. 느긋하게 손가락 접어가며 이야기 하던 공룡이, 일순. 검지 하나 펼쳐들더니, 그대로 똑바로 잠뜰을 가리켜 온다. 그러니까,
" 숨기지 말고 전부 털어 놓아 봐. "
연륜으로 후딱, 해결해 줄테니까. 개구지게 구겨지는 표정은 여전히 퍽 얄밉다. 하지만, 동시에 어쩐지 따라서 웃음이 새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정말이지, 당해 낼 수가 없네. 포기의 한숨 내뱉은 잠뜰이 느릿한 손길로 머그잔의 끝자락을 만지작 거렸다. 이곳으로 돌아온 이유, 모두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 겪어오고, 보아왔던 모든 것들.
" 공룡씨는, 그런 생각해본 적 없으세요? 내가, 여기 있을 자격이 있는지. "
살아 있을 자격이 있는지, 그런 거요. 음, 느릿하게 고개 끄덕이며 듣고 있다는 표시낸 공룡이 똑바로 시선을 맞춰온다. 그 새까만 눈동자 가만 응시하던 잠뜰이, 또 한 번 픽. 한숨에 가까운 웃음소리를 흘린다. 목숨, 당연히 소중하죠. 그러니까 살고 싶었던 거고, 살려고 발버둥 쳤던 거고요. 근데, 막상 살고 나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던 거지? "
사실, 고향으로 돌아갔던 거. 말만 사회를 위한 봉사고 속죄였지. 도망친 거거든요, 여기 남아있는 흔적들로 부터. 고향에는, 전쟁 따윈 전혀 모르는 여전히 따스한 다정을 유지하는 사람들만이 존재했으니까요. 그 틈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 살다 보니까, 점점.
" 잊게 되더라고요. "
내가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건지, 그 갖은 고생까지 하며 버텼던 이유는 뭔지. 삶이란 건 뭘까, 나는 무얼 위해 사는 걸까. 강렬하게 들었던 죄책감과 죄악감은 갈수록 희미해지고, 그저 일상의 한편만이 남으니까. 결국엔,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었어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잠뜰이 느릿하게 시선을 맞춰온다. 그 얼굴 위에는, 여전히 잔잔한 웃음만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을 새까만 눈동자가 가만히 응시한다. 그래서,
" 그래서 찾아오 거예요. 잊지 않으려고, 잊어선 안 되는 거니까. "
이 도시를 찾는 건, 이번으로 두 번 째였다. 처음 기차를 타고 여행길에 올랐을 땐, 꿈에 잔뜩 부푼 채였는데. 어느새, 남아 있는 건 너덜너덜해진 마음 뿐이었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맣게 타버린 꿈을 가득 품에 안은 채로. 이곳이라면, 다시금 정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대감으로. 공룡은 여전히 아무 대답도 내놓지 않았다. 잘만 조잘거리던 입이, 이럴 때만은 꼭 조용했다. 공룡씨는,
" 후회 안 해요? "
별다른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비식, 자조적인 웃음 흘린 잠뜰이 느릿하게 어깨나 으쓱였다. 됐어요, 방금 건 잊-
" 후회하지. "
그것도, 아~주 많이. 전혀 예상치 못 한 대답에, 회백색 눈동자가 곧장 동그랗게 뜨인다. 확신에 가까운, 목소리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잠뜰로서는 전혀 예상하기 어려운 종류였다. 아직도, 매일 밤 생각해. 그 때,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어차피, 끝날 전쟁이었다면. 이렇게 악착같이 살아내지 말 걸, 조금쯤은 온정을 베풀어 볼 걸. 하지만, 뭐...
"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지. "
야, 후회하는 것도 산 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죽어서, 저승가가지고 후회해서 뭐 할 거야? 어? 삶을 바꿔 가는 것도 산 자만이 할 수 있는 특건이다, 이 말이야! 갑작스러운 분위기 변화에, 느릿하게 끔뻑거리던 눈이 곧 가늘게 좁혀진다. 어느새, 비워져 쌓여버린 맥주캔. 뻘겋게 열이 오른 얼굴, 알딸딸하게 취한 듯 꼬이는 혀 발음. 이 아저씨, 취했구만. 진짜 글러 먹었군, 이래서야 인터뷰가 제대로 될 것 같지도 않았다. 잠뜰이 고개 작게 휘젓자, 또 다시 불쑥. 공룡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접혀 올라간다. 순식간에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술기운 따위 조금도 묻어나지 않았다.
" 누가 알았겠어? 내가 지금 이렇게 꽃집을 하고 있을지. 잠뜰씨가, 다시 이곳으로 찾아올 지. "
자기합리화면 좀 어떤데? 원래, 인간은 다 자기한테 관대한 법이야. 빙글빙글, 공중에서 둥그런 원을 그리던 공룡의 손가락이 그대로 제 얼굴 위로 얹혀졌다. 상황을 파악하는 회백색 눈동자가 몇 번이가 끔뻑거린다. 그러니까, 잠뜰씨.
" 인상 좀 펴. "
그렇게 표정 찌푸리면 주름 생긴다? 그대로 주욱, 입꼬리를 잡아당기는 공룡 탓에 잠뜰의 표정이 우스꽝스럽게 구겨졌다. 공중에서 두 사람 분의 시선이 마주친다, 반달처럼 부드럽게 접혀 올라간 눈꼬리 틈으로. 잠뜰은, 희미하게 모습을 감춘 다정같은 것들을 엿본다. 이어, 풉.
으하학!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며, 제 얼굴 틀어막은 공룡이 어깨를 부들부들 떨어댄다. 결국 웃음을 참지 못 한 건지, 터져나오는 웃음은 명쾌하기 그지없다. 그에 잠뜰의 눈썹이 매섭게 찌푸려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 사람은, 꼭 감동 받으려고만 하면. 하여튼가에, 분위기 깨는데 뭐 있어. 입 잔뜩 비죽이고 마음속으로 온갖 투덜거림을 내뱉고 있자면, 공룡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 할 진 몰라. "
분명, 원망도 많이 받겠지. 난 그럴 짓도 많이 했고. 느릿한 발걸음은, 또 다시 녹색빛 가득한 풀숲으로 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도 누군가에게 언젠가 미움을 받는 게 인생인 걸. 그 경도가 다를 뿐이지,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게 있나? 공룡이 지나간 자리에는, 희미한 풀향기 같은 것이 남는다. 팔락 거리며 휘날리는 갈색빛 앞치마에서는, 어쩐지 다정한 나무목의 냄새까지 나는 기분이 들었다. 살아남고 싶었다는 그 때의 감정엔 후회가 없고, 다시 돌아가도 나는 아마 똑같은 행동을 할 거야.
" 살고 싶었으니까, 지금도 여전히 살고 싶어. "
느릿한 발걸음은, 결국 화사하게 핀 꽃들 사이에 멈춰선다. 삶이라는 건 방황이 필수, 그러니 그렇게 이상한 현상은 아니지. 잠뜰씨의 고민도, 지금 내 대답도. 정답 같은 건 없어, 오답 같은 것도 없고. 공룡의 손길이, 풀숲 사이를 스치고 지나간다. 잠뜰은 그 모든 행동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결국, 다들 어떻게 사는 지 궁금해서 다시 찾아온 거지?
" 그래서, 소감은? "
잠뜰은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않았다. 하지만, 공룡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는 듯, 또 다시 느릿한 발걸음을 옮긴다.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 들어온다. 생각보다, 더 별 거 없지? 사람 사는 게 원래 다 그렇잖아. 만화에 나올 법한 일을 겪어도, 목숨을 건 전투를 치뤄도. 일상은 결국에 돌아오고, 변함없이 지루하지. 우리는 세상을 구한 영웅도, 두려움에 떨게 할 악당이 되지도 못 하니까.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자시의 안위가 우선인 이기적인 마음도. 그럼에도 외면하지 못 하는 알량한 도덕심 같은 것도, 결국 전부.
" 우리의 일부니까, 이제 와서 그걸 부정 할 필요는 없어. "
자연스러운 현상이란 말이야. 모두의 일상은, 지루하고 동시에 평화로운 거니까. 파란색 꽃 앞에 멈춰선 공룡의 손길이, 자연스레 줄기 부분을 잘라낸다. 하지만, 살아 있다 보면 종종 재밌는 일도 일어나. 힘든 일도 물론 있겠지, 그래도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거.
" 그게 제일 재밌는 거 아니겠어? "
당장, 몇 년 전의 잠뜰씨도 이런 생활 같은 건 생각도 못 해 봤을 거 아니야. 잠뜰씨, 책 문장 중에 그런 게 있었지.
" 그럼에도, 우리들은 살아 남았다. "
공룡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접혀 올라간다, 느릿한 발걸음은 다시금 잠뜰에게로 가까워진다. 나, 그거 참 좋아하거든. 살아 남았다, 그래. 우리는 살아남았어. 그러니, 후회보단. 파란빛을 잔뜩 내뿜는 꽃이, 그대로 잠뜰에게로 내밀어진다. 쾌활한 웃음은 변함없이 공룡의 얼굴 위로 떠오른다. 반짝 거리는 햇살이, 갈색 빛 머리칼을 남김없이 비춘다. 덕분에, 옅은 색소를 띄는 머리칼이 부드러운 바람을 따라 공중에서 나부낀다.
" 삶을 이어가야지. "
안 그래? 키들거리듯 웃는 목소리를, 회백색 눈동자가 가만 응시했다. 살아나간다, 이어나간다. 어쩌면, 듣고 싶었던 대답은 이 단순한 한 마디였을지도 모른다. 픽, 잠뜰이 그제야 작은 웃음 소리를 흘린다.
" 술 주정뱅이 말은 믿는 거 아니랬는데요. "
잠뜰시, 모르는 모양인데. 나 꽤 술에 강하거든? 이정도론 안 취한다구. 자신만만하게 제 가슴께 두들긴 공룡이 여전히 멀뚱히 제 손에 쥐여져 있던 꽃을 잠뜰의 손에 억쥐로 떠넘긴다. 자, 기분이다. 선물! 다음부턴 무조건 돈 받을 거니까,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고작, 꽃 하나 주면서 별 생색은... 뒤따라 꿍얼거리면, 잠뜰의 머리 위로 아프지 않은 주먹 하나가 닿는다. 어린놈의 자슥이, 어디서 싸으가지 없이! 금세 날카롭게 변한 잠뜰의 시선이 공룡에게로 쏘아진다. 솔직히, 별로 나이차이 나지도 않으면서. 떠오르는 투덜거림은 마음 속 깊숙한 곳에 넣어둔다. 대신에, 이건 작은 복수. 잠뜰의 얼굴 위로 잔뜩 장난스러운 기색이 떠오른다. 무언가의 불길함을 감지한 새까만 눈동자가 빠른 속도로 끔뻑거린다. 공룡씨, 꽤 오글거리는 말을 잘 하시네요.
" 응? 그거야, 뭐... "
" 이거, 전부 녹음 되고 있던 거 아시죠? "
잠뜰이 여전히 착실히 숫자를 표시하고 있는 작은 녹음기 하나를 들어 올린다. 아, 그제야 깨달음을 얻은 듯 공룡은 그 자리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어, 아아아악! 짧둥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진다. 또 다시, 어디선가 불어온 봄바람은 따듯한 온기를 가득 품고 있다. 그 틈으로 향긋한 풀내음과 맑은 웃음 소리가 섞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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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긴 여전하네. "
사박, 조금 가벼운 발걸음이 관리 되지 않아 제멋대로 고개를 빼들고 있는 풀숲 사이를 헤치고 지나간다. 모든 것의 첫 시작, 지난한 전쟁의 순간에도 쉴 수 있는 안락한 공간. 쉘터, 이 다 낡아빠진 집이 그 당시엔 유일한 돌아갈 곳이었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기 짝이 없었다. 다 헤져서 무너지기 직전인 것 같은 건물, 나무로 지어졌지만 군데군데 구멍이 숭숭 뚫려 있고. 거칠게 뜯어진 문짝이라거나, 날카로운 파편 자랑하는 창문이라거나. 몇 년이 지났음에도, 바뀐 건 조금도 없었다. 이 집에 원래 주인은, 행방불명이 되어버린 탓에 몇 년간 사람의 손길은 하나도 닿지 못한 폐가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벽을 타고 자라난 덤쟁이 덩굴들을 보고 있자면. 정말이지, 꼭 소설책에서나 나올법한 다 낡아빠진 유령의 집을 닮아서 조금 기분이 묘해졌다. 한때는, 우리의 삶의 터전이었던 곳이. 이제는 그저 숨겨여 할 그림자의 일부. 즉, 전쟁의 상흔으로 남아 버렸다. 느릿한 손길이 자기 주장 강력한 벽을 한 번 쓸어내린다. 벽에는, 이 집이 버텨낸 세월을 보여주듯 수많은 흔적들이 새겨져 있었다. 깃발을 떼었다, 붙였다 한 흔적. 급하게 발사 된 총탄이 박힌 흔적, 칼로 베인 자국. 거칠게 두들긴 건지, 주먹 자국 그대로 조금 패어버린 흔적. 그럼에도, 가장 선명하게 떠올라 있는 것은. 이곳을 떠나기 직전, 삼삼오오 모여 적어내린 글귀(솔직히 말하면 글귀보다는 낙서에 가까웠다.) 몇 자였다. ' 야호~ 난 살아남았지롱>_< ' 꼭, 누굴 놀리듯 발랄한 말투의 글씨에 결국 작은 웃음 소리가 터져 나온다. 언제나처럼 공룡의 제멋대로인 발상으로 시작 된 일이겠지만, 이제 보니 이런 즐거운 흔적이 조금 정도는 남아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늘은 여전히 높다랗다, 잠뜰의 시선이 천천히 그곳으로 옮겨간다.
전쟁은 끝이 났다. 완전한 끝일지, 그저 잠깐의 휴식일지는. 알 수 없다, 미래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전쟁 전에도 누군가는 전쟁 같은 삶을 살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여전히 전쟁에 한 가운데에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간다. 누군가의 삶을 이어가며, 또 다시 되새겨가며. 잊지 않기 위하여, 기억하고 추억하기 위하여.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연결 된 채로. 누군가와 함께, 또 다시 이 지독하게 지루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간다. 결국, 궁금한 질문에 대한 답은 직접 듣지 않으면 영영 알 수 없다. 후회하는가, 후회하지 않는가. 그에 대한 정의는 아직 조금은 먼 이야기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도 살아간다. 제각각의 이야기 속 주인공으로서, 스스로만의 대답을 내릴 수 있도록. 잠뜰이 천천히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다 낡아빠진 집의 모습도, 이렇게 렌즈 너머로 바라보니 꽤 낭만 있어 보였다. 자연스레 잠뜰의 입꼬리가 끌어 올려진다. 이어, 경쾌한 셔터음 소리가 따라붙는다.
' 찰칵 '
" 잠뜰씨, 사진은 왜 자꾸 찍는 거예요? "
쓸모도 없잖아요. 찰칵, 짧은 셔터음과 함께 돋아난 새싹 하나가 검은 액정 위로 떠오른다. 시비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잠뜰의 고개가 느릿하게 돌아간다. 어디선가 불어온 차가운 바람이 순식간에 공중으로 머리칼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시야가 완벽하게 차단된다. 표정을 숨길 수 있다는 건, 본심을 드러내기에 아주 편리한 핑계였다. 그냥......
" 지금, 우리가 여기에 살아 있잖아요. "
그걸 흔적으로 남기고 싶을 뿐이예요. 그 때, 질문을 던졌던 건 누구였는지. 또 자신의 대답에 어떤 얼굴 표정을 지었는지. 잠뜰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To.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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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 잠뜰이 화원을 나서려는 순간 공룡이 작은 사진 하나를 건네왔다. 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맑게도 웃고 있는 자신의 웃는 얼굴. 깜빡, 회백색 눈동자가 그것을 가만 응시한다.
" 그 때, 흔적으로 남기고 싶다고 했잖아요. "
그래서, 잠뜰씨 흔적은 제가 몰래 찍어 뒀어요. 씨익, 웃어오는 모습에 잠뜰은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제가, 이렇게나 즐거운 듯 웃고 있었던가. 떠올리는 기억들은 언제나 회색빛 어두운 세상이었는데. 사진 속 담긴 자신의 모습은, 여전히 다채로운 세상 한 가운데에 존재했다.
" ...이거, 초상권 침해죠? "
공룡이 곧바로 앙탈같은 목소리를 흘려댔다. 에엥~ 우리 사이에, 쩨쩨하게 그러지 맙시다. 픽, 결국 잠뜰에게서 짧은 웃음이 터져나온다. 고마워요. 작은 대답에는, 또 한 번 맑은 웃음이 돌아왔다. 아, 그걸 못 물어봤네. 공룡이 또 다시 무언가 떠오른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또 다시 공중에서 두 사람분의 시선이 맞부딪힌다. 자연스레 반달처럼 휘어지는 눈가에는 즐거움만이 가득하다.
" 그래서, 이번 책의 제목은 뭐예요? "
느릿하게 끔뻑거리던 회백색 눈동자가 천천히 굴러간다. 새파란 하늘, 따듯한 태양빛. 녹음과 평화로움만이 가득한 이 세상. 지그시, 두 눈을 감아도. 찾아오는 것은 암흑 대신 햇빛의 따스함이다.
" 그건... "
From. 삶을 살아가는 또 다른 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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