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소장
검사 ---은 아래와 같이 공소를 제기합니다.
피고인 성명 박잠뜰.
죄명 미정.
적용 법조 세계질서법 제1조 2항 세계의 일원은 세계의 존속에 관여할 수 없다. 세계질서법 제3조 5항 세계의 일원은 세계를 구성하는 시간과 공간을 조작할 수 없다.
변호인 ---
공소 사실 피고인은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을 변화시켜 천이백이십팔만천구백구십오 개의 세계를 멸망시켰다.
“이야, 하필 ---한테 걸리셨네요, 잠뜰 씨.”
짙은 갈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가 양손에 들고 온 잔을 탁자 위에 올려두며 부산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는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가 무색하게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잠뜰은 개인적인 인상은 둘째치더라도 그가 꽤 호감상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바짝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힘이 조금 빠져나갔다. 그가 내려놓은 잔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잠뜰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누구요? 그가 내뱉은 문장은 분명 소리가 되어 들려왔으나 잠뜰의 해석까지는 다다르지 못했다. 다른 언어라기보다는, 그래, 다른 종족의 소리 같았다.
“아, 죄송, 죄송. 인간들의 말로 하면 김각별이죠.”
이 공소장 낸 놈 말이에요. 남자가 엄청난 비밀을 알려주는 것마냥 몸을 기울이며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하지만 그 일련의 행동이 과장된 연극의 한 장면 같았기 때문에 잠뜰은 그저 무미건조한 얼굴로 그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아, 네, 따위의 대답만 내어놓았다. 반응을 기대하며 눈을 반짝이던 남자는 이내 흥이 식었는지 도로 소파에 몸을 푹 기댔다. 김각별 다 죽었네. 그런 말을 중얼거린 것도 같았다. 하지만 잠뜰에게 이 괴상한 공소장을 제출한 이의 정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마주한 모든 순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이름을 들어봤자 그게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남자가 입을 다무니 불편한 적막이 찾아왔다. 그 고요함을 깰 생각은 없었다. 잠뜰에게는 이 상황을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괜히 남자가 건네 온 잔을 들어 사교적으로 보이려고 애쓰는 대신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왔을 때부터 느껴졌던 익숙함이 온몸을 감쌌다. 평범한 가정집으로 보이는 이곳에는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소파가 있었고, 남자가 잔을 올려둔 탁자는 손때가 탄 정겨운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시선 끝에 닿는 것들이 어쩐지 향수를 자극하는 것만 같았다. 이런 집을 내가 알고 있던가. 잠뜰이 소리 없이 고민에 잠겼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 유의미한 기억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정신은 또렷했으나 무언가가 자꾸만 머리를 흐리는 기분이었다.
도로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니, 그는 어느새 잠뜰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제 손에 들린 두툼한 서류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는데도 눈길 하나 주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발밑에서 사락거리는 카펫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리 고급스럽지만은 않은 느낌이었지만 잠뜰은 자신이 그것을 못내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체 모를 향수가 머리를 콕콕 찔렀다. 잠뜰이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뜨끈해진 얼굴 위로 찬 공기가 스며들었다.
나무 무늬를 한 바닥을 지나 도착한 부엌에는 막 닦은 것 같은 유리컵 몇 개가 거꾸로 세워져 있었다. 아까 남자가 거실로 가져다주었던 것과 같은 디자인이었다. 이 집의 주인, 그러니까 아마 그 남자도 잠뜰처럼 같은 것을 여러 개 사는 습관이 있는 모양이었다. 자석 하나쯤은 붙어 있을 법도 한데 깨끗하기만 한 냉장고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소파에 앉아있는 남자는 여전히 무언가를 종이 위에 적으며 그것에 열중하고 있었다. “저기요.” 작지만 거실에 있는 남자에게 분명히 들릴만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집 안을 돌아다니는 것을 어련히 허락한 표현이겠거니 받아들인 잠뜰은 부엌에서 나와 바로 옆에 있는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정리를 하지 않아 잠에서 깬 그대로 어질러져 있는 침대가 보였다. 푸른색의 두툼해 보이는 이불과 작은 침대의 사이즈가 남자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즈음, 잠뜰은 그대로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침대 옆 서랍장 위에 놓인 액자가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커다란 꽃다발을 품 안에 안고 환하게 웃어 보이는 교복 입은 여자애의 사진이 뭐 그리 특별하겠느냐고 묻겠지만, 그게 특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뜰이 팔을 뻗어 액자를 손에 쥐었다. 시름 하나 묻어 있지 않은 해맑은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그 여자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잠뜰이었다. 가슴 한쪽에 붙어 있는 노란 명찰 위에도 그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박잠뜰. 이제는 흐릿해진 기억 속의 교복을 바라보다가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휙 고개를 돌렸다. 방문 앞에 남자가 서 있었다.
갑자기 찬 물을 뒤집어서 쓴 것 같았다. 호감상이라고 생각했던 얼굴이 순간 섬뜩해 보였다. 여태 몽롱했던 모든 순간이 현실이 되어 날카롭게 벼려졌다. 이건 꿈같은 게 아니었다. 잠뜰은 그제야 이 집이 완벽하게 만들어진 그의 어린 시절 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손에 들려 있던 액자를 무기처럼 쥐고 앞으로 뻗었다. 뭉툭한 액자 모서리가 남자를 향해 있었다. 이걸 휘두르는 것보다 상대에게 붙잡히는 것이 더 빠르리라는 것을 예감하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얼굴에는 의아함이 떠올라 있었다. 지독하리만치 순수한 표정이 도리어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당신 누구야?”
“아, 거기서부터 시작인가요? 난 또, 잠뜰 씨가 꽤 덤덤하기에 다 알고 있는 줄 알았지.”
“대답부터 해.”
“네, 좋아요. 다시 소개하죠. 저는 박잠뜰 씨의 재판에 배정된 변호사 정공룡이라고 합니다. 혹시 다른 이름도 궁금하세요? 제가 여태 맡은 생명체들의 언어로 된 이름은 말씀드릴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맡은 종족들이 개, 토끼, 비둘기, 펭귄, 상어…….”
“아뇨, 아뇨, 됐어요.”
잠뜰이 황급히 그의 말을 끊었다. 자신을 공룡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잠뜰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들 한 번쯤은 듣고 싶어 하던데. 방금까지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서늘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의 얼굴은 도로 이전의 미소를 띠고 있었다. 공소장도 다시 읽으시겠어요? 친절한 말투는 꽤 정중했으나 명백히 꾸며낸 듯한 태도였기 때문에 어딘가 거슬리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잠뜰이 고개를 저었다. 대신 손에 들고 있던 액자를 스르르 내렸다. 김이 빠졌다.
“나처럼 챙겨주는 변호사 없어요. 당신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이 순간을 그대로 재현해 주었잖아요?”
“제가 언제 이 순간을 그리워했다고…….”
순간적으로 답하면서도 그리 자신감 있는 어조는 아니었다. 실제로 잠뜰은 이 집 안에서 정신을 차린 순간부터 살면서 잊고 있었던 과거에 대한 열망 같은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건 한순간이었다. 잠뜰의 바람에 대해 꽤나 확신하고 있는 변호사라는 이 남자의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싶었다.
“정말 절 생각했으면 이런 지나가는 추억이 아니라 남극기지를 만들어내셨어야죠.”
“왜요?”
돌아오는 물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에 대한 자존심의 상처보다는 모르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더 큰 것 같았다. 어쩌면 인간 따위의 생각 하나 읽지 못한 것에 크게 신경 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잠뜰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포근하게 내리는 흰 눈은 잠뜰을 그 멸망의 순간으로 되돌려놓는 것 같았다.
“인간들은 이상해요. 태어난 자리는 모든 삶의 시작이었으니 그곳을 그리워해야 마땅한데, 왜 죄다 죽은 자리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지.”
“그야 당연하죠.”
무어라 생각할 틈도 없이 대답이 튀어 나갔다. 이 집이 그리웠던 것과 별개로, 잠뜰은 자신이 마지막을 준비할 곳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건 당연히 그가 세계의 멸망을 목격했던 남극기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만들어 온 인생의 종점이 그곳이니까요. 태어난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내 기쁨도, 슬픔도, 희망도, 절망도 없어요. 그러니까 죽은 자리로 가려는 거예요. 나라는 사람이 온 인생을 바쳐서 어떤 인생을 만들었는지 궁금한 게 당연한 거잖아요.”
오. 공룡이 이해가 전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감탄사를 뱉었다. 심히 의도적이어서 차라리 연극 배우의 과장된 외침이라고 하는 쪽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는 잠시 펜으로 서류를 톡톡 치더니 펜 끝을 입에 물고 종이를 휘리릭 넘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방금 그 말은 재판에서 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멸망이나 죽음을 숭배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거든요. 공룡의 대답에 잠뜰은 자신이 들은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뭘 숭배해? 상상한 적 없는 대답을 한 글자씩 떼어내어 이해하고 나서야 잠뜰은 경악한 표정으로 얼굴을 구겼다. 그는 정말 잠뜰의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공룡은 잠뜰의 반응을 확인하지 않은 채로 계속 말을 이었다.
“물론 저는 잠뜰 씨가 세계를 구하는 일에 있어서 진심을 다했음을 알고 있지만요, ---는, 아, 그러니까 김각별 말이에요, 애가 감성이 없거든요. 사실관계만 파악하면 재판이 끝나는 줄 알아. 사실 인간의 일이란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점에서 저는 김각별보다 인간을 잘 이해한다고 볼 수 있죠.”
원래도 그가 친밀한 인간처럼 느껴졌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 순간 잠뜰은 아득한 존재에 대해 인지하고 말았다. 제 앞에 있는 이는 피고인에 맞추어 인간임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했다. 잠뜰은 갑자기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이건 인간이 개들의 재판을 맡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영영 이해 못 할 심리를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착각하며 그들만의 잣대로 인생을 평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는 그래서 이쪽으로 변호를 해보려고 해요. 어차피 잠뜰 씨가 수많은 세계를 멸망시킨 것은 명백한 사실이에요. 그러니 죄 자체를 없앨 수는 없죠. 대신 정상참작을 해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가 종이에 무언가를 휘갈기고서 그 종이를 잠뜰에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서 든 잠뜰은 눈으로 적힌 내용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세계질서법 제1조 2항 세계의 일원은 세계의 존속에 관여할 수 없다. 세계질서법 제3조 5항 세계의 일원은 세계를 구성하는 시간과 공간을 조작할 수 없다. 아까 공소장에서도 언뜻 봤던 내용이었다.
“검사 측에서 걸고넘어질 법 조항이에요. 전적으로 부인하진 못할 거예요. 다만 잠뜰 씨는 결국 하나의 세계를 구했으니 할 말은 있어요. 자신의 세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지켜내려는 의지가 깃들어 있었고, 다른 세계들의 멸망은 그에 따른 숭고한 희생이었던 거죠.”
죽을힘을 다해 달렸던 인생을 타인의 건조한 시선에서 본다는 것은 아주 기이한 경험이었다. 잠뜰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멸망과 죽음을 숭배? 숭고한 희생? 그딴 게 다 뭐야. 죽음은 죽음이다. 다른 의미가 없다. 끝이라는 것은 끝나기 전에나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것에 숭고함 따위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기만이나 다름없다. 잠뜰이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항상 그런 식으로 변호를 맡았어요?”
비아냥거리려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껏 그런 말투로 쏘아져 나갔다는 것은 잠뜰도 부정할 수 없었다. 말을 잇던 공룡이 고개를 들었다. 뚝 끊긴 목소리 사이로 그가 두 눈을 깜박였다. 누구에게도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갑자기 울분이 차올랐다. 변호사라는 이가 자신이 맡은 의뢰인의 생각 따위는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내가 세계를 멸망시켰다고요?”
“그건 어떻게 할 수 없는 사실…….”
“맞아요. 내가 그랬어요. 나는 정말 살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떤 방법을 써도 저는 살 수가 없더라고요. 대신 내 세계는 아니더라도, 하나의 세계라도 살아남는 걸 본다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네, 일종의 대리만족이죠. 그래서, 그래서 그랬어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말이었다. 심지어 함께 타임 스테이션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이들에게도 속마음을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그들에게 장관이란 모든 순간에 가장 이성적으로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하지만 정말 아무도 잠뜰이 어떤 생각으로 이 일에 뛰어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챈 순간,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세계질서법이요? 진짜 웃기는 사람들이네. 아, 사람이 아닌가? 그럼 신? 당신네들 말이에요. 우리가 그렇게 죽어가는 동안 유흥거리로 구경이나 했을 거면서 나한테 선처하듯이 말하지 마세요. 그냥 날 지옥에나 보내요.”
공룡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참 말 안 듣는 의뢰인이네. 전혀 숨길 생각 없는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그리고 그것은 잠뜰의 감정에 기름을 더 붓는 꼴이었다. 공룡을 방 밖으로 떠민 잠뜰이 현관을 가리켰다.
“나가요. 어쨌든 여기는 내 집이니까요.”
공룡은 별수 없다는 표정으로 양손을 들었다. 그렇게 재촉 안 해도 나갈 거예요. 그럼 내일 뵙죠. 이내 문이 탁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폭풍이 휩쓸고 간 것 같은 분위기 이후에 남은 것은 시린 공백이었다. 멸망하던 날도 그랬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던 창밖, 그리고 포기한 이들의 조그마한 숨소리, 아무것도 직시할 수 없어 그저 눈을 감는 것을 선택한 어떤 장관.
공소장이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잠뜰이 그것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공소 사실 피고인은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을 변화시켜 천이백이십팔만천구백구십오 개의 세계를 멸망시켰다……. 그렇게나 많았구나. 그제야 그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세계가 영영 멸망했다는 사실을 실감하였다. 잠뜰은 타오르는 모닥불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소파 위에 웅크리고 앉았다. 끌어안은 무릎 위로 얼굴을 묻었다. 숭고한 희생이라고.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입술 끝에서 발음되는 단어가 끔찍이도 낯설었다. 사실 그냥 욕심이었을 뿐이었다. 살고 싶었다. 사랑했던 세계에서, 사랑하는 것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평안해지고 싶었다. 대단한 목표도, 대단한 사명도 없었다. 눈가가 축축해졌다. 하지만 결국 그것을 지켜내지 못했으니, 그리고 치기 어린 시도의 결과로 없어도 됐을 멸망을 초래했으니,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마땅했다. 남들에게 고통을 준 만큼 돌려받아야 했다. 그러니 변호 같은 건 쓸데없었다. 잠뜰은 재판관에게 간청할 것이었다. 부디, 자신을 지옥에 보내 달라고. 변호사에게 한 말 중 그것만큼은 진심이었다.
*
박잠뜰은 유망한 환경과학자였다.
한국대 지구환경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유학 한 번 다녀오지 않았음에도 내어놓는 연구 실적이 말 그대로 대단했다.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논문들이 권위 있는 과학 잡지에 여럿 실릴 무렵 남극기지의 장관 자리에 대한 제의가 왔고, 잠뜰은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과학자는 예언하는 존재가 아니다. 다만, 기다리고, 관찰하고, 분석하여 그다음에 올 일을 추론해 내는 존재다. 그러니 그가 예측한 멸망은 뜬구름 잡는 소리도, 어쩌다 찍어 맞춘 재앙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 그들이 통째로 세상에서 영영 사라질 날이 온다는 것을 알아채고야 말았을 때, 잠뜰은 미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로 어떠한 일들은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완성되는 법이었으니, 지구는 이미 기승전을 지나 결로 다다르고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이야기 전개와 복선을 지나, 그에 알맞은 결말로.
그런 잠뜰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지금부터 바꿀 수 없는 미래는, 그 미래가 만들어진 시초부터 뿌리째 바꿔야 한다.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다면, 과거를 바꾸는 것이 현재를 바꾸는 일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평행 세계라고 하던가. 처음에는 절망도 했다. 아무리 과거를 바꿔도 자신이 살 방법은 없다. 이 세계를 구할 방법도 없다. 이미 멸망의 초입에 들어선 세계를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아마 그곳에도 잠뜰이 있을 것이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지만. 그게 꼭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지. 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하나의 세계라도 구할 수 있다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건 숭고한 희생 같은 게 아니라…….
해가 뜨기도 전에 몸을 일으켰다. 그 무례한 변호사는 오늘도 집에 온다고 했었다. 언제 올지 모르니 일어나 있는 상태로 있고 싶었다. 자는 채로 그를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왔다. 희미한 새벽빛 속에 주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집 밖은 그가 예전 살던 동네가 아니었다. 집만 똑 떼어 온 모양이지. 눈이 쏟아지는 거리로 발을 내디뎠다. 집 문 앞에는 무언가 팻말이 붙어 있었는데, 잠뜰은 읽을 수 없는 문자였다. 아마 그의 이름이 아닐지 추측할 뿐이었다.
하얀 풍경은 질릴 정도로 익숙했다. 남극기지의 과학부 장관으로서 매일 같이 봐왔던 풍경이 아니겠는가. 다만 보이는 것과 달리 그리 춥지는 않았다. 희미하게 추위가 느껴지기는 했으나 눈밭 한복판의 그것은 아니었다. 잠뜰은 더 고민하지 않고 자리에 털썩 앉았다. 눈이 체온에 녹아내렸다. 물기가 느껴졌지만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 남극에서는 이렇게 바깥으로 나갈 일이 없었다. 바쁘다거나 실내가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나갈 수가 없었다. 태양의 이상 활동은 날이 갈수록 예측하기 어려워졌고 그렇기에 실외 활동은 아주 큰 위험을 동반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렇게까지 바깥 공기가 좋은데. 그러다 보니 웃음이 나왔다. 이미 죽었는데 숨을 쉬는 게 맞나? 실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여유를 부린 것도 얼마 만인지.
“여기서 뭐해요?”
느닷없는 목소리는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의 옆으로 따뜻한 코코아가 담긴 잔이 내밀어졌다. 한참 전부터 집 밖에 앉아 있었는데 그가 걸어오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잠뜰이 잔을 받아 드는 대신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목소리의 주인을 살폈다. 변호사는 잠뜰의 노골적인 경계에도 당황한 기색 없이 물었다.
“왜요?”
“오는 거 못 봤는데요.”
“아. 걸어서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공룡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제야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순간이동이라도 할 수 있는 모양이다. 인간의 상식선에서 이해하기를 멈춘 잠뜰은 이번에는 잠자코 코코아 잔을 받아 들었다.
“들어가서 이야기 좀 해요.”
그는 어제와 같은 검은 양복에 초록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초콜릿색 머리칼 위로 눈이 송이송이 쌓였다. 그의 제안에 충분히 바깥 구경도 했다 싶어 몸을 일으켰다. 엉덩이 아래에서 녹아 내렸던 눈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다. 이 세계의 비현실성은 예고도 없이 그렇게 들이닥친다. 공룡이 기대한 것과 달리 이곳은 그의 기억과 꽤 큰 차이가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똑같이 만들어 둔다고 해서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장소’라는 건 그렇다. 누가 어떤 방식으로 머무느냐에 따라 의미가 변하는 거니까. 그럼 잠뜰은 또 생각하고 마는 거다. 이건 끝 이후의 공간이다.
공룡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잠뜰의 허락도 받지 않고서 거실 소파에 앉았다. 팔걸이가 헤진 낡은 소파가 끼익 소리를 냈다. 그들의 가운데 놓인 탁자에는 어제 두고 간 공소장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공룡이 그 옆에 새로운 서류철을 꺼내 내려놓았다. 파일 사이에 끼워져 있는 종이에는 웬 사진과 신상정보가 적혀 있었는데, 공룡 가까이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슬쩍 보아서는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잠뜰의 시선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공룡이 파일을 쓱 뒤집었다.
“아직은 안 돼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계속 삐딱한 말투가 쏘아져 나갔다. 어제의 감정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탓이었다. 하지만 공룡은 신경 쓰지도 않는 눈치였다. “궁금해했잖아요. 증인들에 대한 건데, 지금은 말해줄 수 없어요.” 그가 서글서글 웃으며 답했다. 의도하고 한 행동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남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긴장감을 풀고 마음을 내려놓게 하는 그런 사교적 행동 말이다. 그건 그의 종족이나 직업상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본질적인 그 자체의 성격이나 특징이라고 해야 하나. 잠뜰이 한숨을 푹 내쉬며 들고 있던 코코아 잔을 탁자 위에 올렸다. 이런 사람을 상대하는 데에는 예전에도, 그러니까 그가 살아있던 시절에도 별로 소질이 없었다.
“오늘은 대화를 좀 나눴으면 해요.”
공룡이 먼저 본론을 꺼냈다. 그는 이제 손에 손바닥만 한 수첩을 들고 있었다. 대화를 하면서 뭐라도 적을 요량인 듯 싶었다.
“내일이 재판이거든요.”
“벌써요?”
“보통 사람들은 하루면 끝나요. 잠뜰 씨는 좀 복잡한 사안이라.”
하긴. 납득은 갔다. 재판이라고는 하지만 인간들이 하는 것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사안으로 보아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세계의 과거를 바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이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제가 한 일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멸망을 막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변수와 희생을 감당해야 하는지도. 잠뜰은 또 멀거니 그의 프로젝트에 동원된 부하 직원들을 떠올렸다. 자신들은 구원받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장관의 고집에 어울려 주었던 이들. 잠뜰이 마른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무슨 대화를 하고 싶은데요?”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눈앞의 뻔뻔한 변호사에게는 제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저를 도와준다고 하고 있지만, 그에게 모든 걸 보여주는 건 어쩐지 약점을 잡히는 기분이었다. 그가 그다지 사려 깊게 행동하지도 않았고.
“어제는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잖아요. 제가 당신을 변호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자세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예상외로 정상적인 말이네요.”
“어라, 그거 지금까지 제가 비정상이었다는 말?”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잠뜰이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당연하게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인간 기준에서는 말이다.
“잠뜰 씨. 난 잠뜰 씨를 도와주고 싶은 거예요.”
“네, 뭐…….”
시원찮은 대답에 공룡이 그의 잔에 코코아를 더 따라주었다. 서늘한 거실에 내어놓은 지 꽤 됐는데도 코코아는 여전히 따뜻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걸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서 마셔요. 단 걸 마시면 기분이 풀리잖아요.” 그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마 비장의 수, 그 비슷한 거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잠뜰이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을 흘렸다. 그는 벼려진 말을 건넬 줄 알면서도 어느 면에서는 그저 천진난만한 소년 같았다.
“그래요. 한 번 이야기해 보세요.”
앙금이 조금 풀린 목소리로 툭 말을 건네자 공룡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들썩거렸다. 일순간 신이 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잠뜰 씨가 과거를 바꾸기로 결심한 그 내막부터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다 아는 이야기 아닌가요? 멸망을 앞두고 못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지구 멸망을 알아챈 때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고, 그러니 과거로 돌아가 해결하려고 한 거죠.”
“그럼 과거를 바꾸어봤자 잠뜰 씨가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이후로는요?”
“…….”
그때 무슨 생각을 했더라. 잠뜰이 침침한 기억 속을 헤집었다. 처음 그 사실을 깨달았던 건 그가 앞당긴 기술 발전이 그의 세계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뒤였다. 토마호크 혜성에 대한 연구는 너무 뒤늦게 이루어졌고, 그걸 완성하기도 전에 인류는 멸망을 목도하고 있었다. 연구원들의 수가 턱없이 부족해 토마호크 혜성을 태양으로 보낼 기술력 연구도 힘들었다. 그건 제아무리 과거에서 정보를 얻은 잠뜰도 단기간 내에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절망스러웠다. 여태 그들이 마지막 방법이라고 생각해 쏟아부은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분했다.
그의 아래에서 일하던 남극기지 연구원들을 불러 모아 제가 깨달은 사실을 공표할 때는 자괴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들에게 일말의 희망을 불어넣은 것도 잠뜰이고, 그걸 빼앗게 된 것도 잠뜰이다. “중대한 발표 사항이 있습니다.” 목소리가 떨렸던가. 그랬던 것도 같다. 인구수가 급격히 감소하고, 모든 인류가 남극에 남아 간신히 살아남았던 시점부터 잠뜰에게는 함께한 동료들이 곧 가족이었다. “크로노스 프로젝트는 반드시 성공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와 상관 없이 우리는…….” 어떻게 그들에게 우리의 죽음이 불변하는 미래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다들 계속하자고 했거든요.”
“다들?”
“제 가족들 말이에요. 아, 피가 이어진 가족 말고요. 남극기지에서 끝까지 함께 했던 동료들이요.”
가족이라……. 공룡이 흥미롭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인간의 가족 개념은 참 흥미롭군요. 그가 수첩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이게 재판과 무슨 관련이 있나 싶지만 구태여 물어봤자 그를 이해하기란 몹시 어려울 거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았다.
“가족이라는 건 굉장히 끈끈하다는 비유인가요?”
“뭐, 대충 그렇다는 뜻이죠.”
끈끈하다고만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자세히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사전적인 의미를 말해봤자 공룡에게 제대로 전달되지는 않을 터였다. 가족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것들을 그가 어떻게 알겠는가. 잠뜰이 입을 다물었다. 문득 궁금해진 것이 있었다.
“공룡 씨한테도 가족이 있나요?”
“저요?”
“왜 그렇게 놀라세요?”
“아뇨. 저한테 뭘 물어본 의뢰인은 잠뜰 씨가 처음이라서요.”
공룡이 하핫 소리를 내며 웃었다. “신선하네요, 가족이라니.”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그에게 자신과 같은 의미의 가족 같은 건 없다는 게 뻔했다. 제 가족에 관해 묻는데도 저런 호기심 많은 탐구적 태도라니. 내내 흥미로운 관찰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이 조금은 불쾌하다고 느끼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잠뜰도 아마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공룡의 존재에 대해 궁금해했을 테니까.
“이런 말씀 죄송하지만,” 공룡이 멋쩍은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제가 인간들 사이에 작용하는 비가시적인 작용에 관심이 많아요.”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비가시적인 작용이라니?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고 바라보자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가족이나, 친구나 그런 거 말이에요. 사랑, 우정, 애정, 신뢰……. 전부 저에게는 낯선 개념들이거든요. 그래서 잠뜰 씨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요. 어제 저는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변호를 준비한 건데, 잠뜰 씨가 전부 부정했잖아요. 그쪽에게 돌아오는 이득이 없는데도 남을 구하려 들고, 하나의 좋은 결과를 위한 멸망은 숭고한 희생 따위가 아니라고 하고.”
그가 등을 소파에 기댔다. 항상 웃음을 걸고 있는 공룡이 미소 사이로 언뜻 답답함을 내비쳤다.
“문제는 그쪽이 날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아니에요.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다는 게 문제죠.”
잠뜰이 코코아를 호로록 마셨다. 적당히 따뜻한 코코아는 공룡의 말대로 사람의 기분을 풀어주는 데는 좋은 효과가 있었다.
“공룡 씨는 희생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타인이나 다른 목적을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거 아닐까요?”
“맞아요. 중요한 건요, 결국 희생의 주체는 무언가를 잃는다는 거예요.”
코코아 잔을 놓았던 자리에는 뿌연 김이 서려 있었다. 잠뜰이 그것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닦았다. 유리 아래 탁자 무늬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한때는 세상 돌아가는 것이 모두 비슷하다고 생각했을 때도 있었다. 이렇게 가늠하기 어려운 것들도, 밝혀내고자 노력하면 결국 다 보일 거라고. “그렇다면, 자발적이지 않은 희생은 뭘까요.” 수첩 위를 톡톡 두드리던 공룡의 볼펜 소리가 뚝 멈추었다. 그도 잠뜰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감을 잡은 거다.
“세상에 숭고한 희생 같은 건 없어요.” 단호한 어조였다. 반대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다짐마저 서려 있었다. “아무리 스스로 결정했다고 해도요.” 잠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공룡의 시선은 소리 없이 그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창문에 다가가 커튼을 열어젖혔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이제는 눈도 그친 상태였다. 겨울 햇살이 하얀 눈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그럼 왜 많은 인간들이 남을 위해 희생하나요?”
“글쎄요. 저는 환경과학자이지 심리학자는 아니어서요.”
“저는 이해가 안 가요.”
공룡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그 위에는 글자로 보이는 것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는데, 잠뜰이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걸로 보아 그들의 언어인 것 같았다.
“그동안 인간에 대해 탐구했어요. 많은 이들이 목숨 걸고 가족을 지키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던져 가며 복수하고, 때로는 일면식 하나 없는 타인을 보호하려고 애쓰기도 해요. 이 사람들은 이레귤러가 아니에요. 역사적으로 봐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거든요.”
“공룡 씨한테는 소중한 게 없나요?”
“음, 제 직업이요?”
“그런 거 말고요. 친구라든가, 아니면…….”
“…….”
“없으면 영원히 이해 못 해요.”
잠뜰이 가볍게 웃었다. 하긴. 사랑, 우정, 애정, 신뢰. 이런 것들이 전부 낯설다고 했다. 그들에게는 관계라는 게 그리 중요하지 않은 요소인 모양이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지는 않다. 그의 변호사는 내내 친밀한 관계를 맺어본 적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함부로 평가 내리고, 제 판단이 옳을 거라고 굳게 믿고. 그것에 불쾌함을 드러내면 도리어 어리둥절해하고. 그들 말마따나 ‘비가시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결정이다.
“그럼 잠뜰 씨는 왜 본인에게 이득도 없는 일에 그리 몰두한 거예요?”
“동료들이 하자고…….”
“결국 결정은 잠뜰 씨가 한 거잖아요. 그 결정에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입을 합 다물었다. 맞는 말이다. 결국 최종 결정은 잠뜰의 몫이었다. 지금 이 순간 재판을 받기 위해 서 있는 게 잠뜰인 것도 전부 그 탓이다. 그의 동료들은 그가 어떤 선택을 내리든 따를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만큼 연구원들의 장관에 대한 지지와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다른 세계를 구하는데 몰두할 만큼.
그렇다면 나는 왜 그랬을까? 스스로에게 물었다. 공룡에게 말했던 것처럼 엄청난 뜻은 없었다. 누군가에게 영웅이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 포부를 가지기에 그는 평범하고 나약한 한 명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에는 과감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온다. 잠뜰에게는 그게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결국 대답은 제 안에 있다. 그가 찬찬히 입을 열었다.
“비록 나의 세상이 사라져도 인류가 살아남는 단 하나의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면 이 여행의 가치는 충분하니까요.”
잠뜰이 중얼거렸다. 여행자, 즉 성공한 세계에 살아남은 그의 대리자에게 보내는 영상에서 했던 말이었다.
*
재판장으로 향하기 위해 집을 나선 것은 해가 머리 꼭대기에 뜬 뒤였다. 잠뜰은 머리까지 싹 넘기고 등장한 변호사를 보고 그만 푸하하 웃고 말았다. 실로 오랜만의 폭소였다.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하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수많은 의뢰인 중 한 명, 이해 못 할 인간일 텐데 최선을 다하는 게 놀라웠다. 오로지 저를 위해 노력하는 이를 보는 게 얼마 만이던가. 헤아리는 건 의미가 없어 그만두었다.
공룡은 전날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지고서 돌아갔다. 그 뒤로는 내내 자유시간이었다. 시계도 없는 곳에서 잠뜰이 알 수 있는 건 해의 위치에 따른 어림짐작뿐이었다. 그는 소파에 조용히 몸을 기대고 생각을 이어갔다. 첫인상과는 달리 공룡은 꽤 프로페셔널한 변호사였다. 지금 검사 측에서 내미는 카드는 분명 잠뜰에게 치명적으로 불리했다. 따지고 보면 누명 같은 것도 아니었다. 잠뜰은 그것에 큰 유감은 없었지만, 그의 변호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어떻게 해서든 형량을 줄이는 게 목적이라고 했다. 그렇게 안 보여도 꽤 자신의 직업에 애착이 있는 듯싶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에게 발언권이 주어진 순간 모든 결정은 검사와 재판장에게 맡길 거라는 의사를 전달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결정을 조금 유보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변호사의 정성이 갸륵했고, 또 조금은 웃겼다.
공룡과 함께 도착한 법정은 마지막 순간 그가 머물렀던 남극기지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맞춤형이에요.” 공룡이 옆에서 속삭였다. 재판은 피고인을 압박하려는 게 아니고, 중대한 법을 어긴 경우 죄에 합당한 벌을 내려 업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는 설명이 덧붙었다. 마음에 확 와닿지는 않았다. 단번에 이해하기에 공룡은 첫 만남부터 그의 중죄를 열심히 설명하지 않았는가.
법정 안에는 이미 한 남자가 와 있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남자가 노란 눈을 빛내며 법정 안으로 들어서는 잠뜰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 안에서 감정 같은 건 읽을 수 없었다. “쟤가 김각별.” 공룡이 또 속삭였다. 그게 누구냐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순간 그의 말이 떠올랐다. ‘공소장 낸 놈.’ 검사라는 뜻이었다. 인간을 위한 재판이랍시고 이해하기 쉽게 구색은 맞춰 놓았다. 잠뜰이 검사를 향해 눈인사를 건네자, 그가 한쪽 눈썹을 쓱 올리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공룡이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잠뜰 씨가 이겼어요.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어 잠자코 제 자리를 찾아 따라가기만 했다.
재판장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괴상한 망토를 두르고 나타났다. 얼굴을 보이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는 검사와 변호사를 따라 눈치껏 일어나 허리를 꾸벅 굽혔다. 방청객도 없는 법정이었지만 비어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자신의 죗값에 일말의 너그러움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지 않은데도 마음이 조금 술렁거렸다. 살면서 검사나 판사를 만나본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그야, 평범하게 법을 잘 지키며 사는 사람들은 만나기 쉽지 않은 사람들이었으니까. 잠뜰이 침을 꿀꺽 삼키자 공룡이 무언가를 건넸다. 그 정체를 눈으로 확인하기도 전에 알아챘다. 달큰한 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코코아에요?”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슨 법정에 코코아를 들고 와? 그것도 변호사가? 그리고 대체 어디서 꺼낸 거야?
“긴장 좀 풀어요. 그리고 여기서는 코코아 정도는 마셔도 돼요.”
거짓말은 아닌지 다들 잠뜰의 손에 들린 코코아 잔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황당하기는 했지만 효과가 없진 않았다. 손에 따스한 온기가 스며 들어오는 것부터 마음에 안정이 왔다. 그 사이에 재판장이 검사에게 손짓을 했다. 발언을 시작하라는 의미였다. 검사가 종이 한 장을 들고서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사 김각별은 다음과 같이 공소를 제기합니다. 피고인 성명 박잠뜰. 죄명 미정. 세계중대재해법에 의거하여 판결 이후 결정될 예정입니다. 적용 법조 세계질서법 제1조 2항 세계의 일원은 세계의 존속에 관여할 수 없다. 세계질서법 제3조 5항 세계의 일원은 세계를 구성하는 시간과 공간을 조작할 수 없다. 피고인은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을 변화시켜 천이백이십팔만천구백구십오 개의 세계를 멸망시켰으므로 공소를 제기합니다.”
재판장이 잠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눈에 띄게 고개를 돌린 건 확실했다. 잠뜰이 어리둥절하게 공룡을 돌아보았다. “공소 사실을 인정하는지 묻는 거예요.” 공룡의 친절한 설명에 잠뜰이 아,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인정합니다.”
재판장은 법정에 들어온 뒤로 입을 한 번도 열지 않았지만, 검사와 변호사는 그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소통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슬그머니 세웠다. 돌아가는 양상을 모르니 자꾸만 공룡의 눈치를 보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공룡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은편의 검사는 이미 자리에 착석한 채였다.
“잠뜰 씨.”
“네.”
“이제부터 증인을 부를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요.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자신만만하게 단언한 공룡이 재판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희는 검사 측의 공소 사실을 전부 인정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는 멸망한 세계들 외에도 고려해야 하는 사항이 많습니다. 이에 따라 증인을 법정에 세우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증인을 이미 구했다고 했다. 잠뜰은 그가 말하는 증인이 대체 누구일지 궁금했다. 함께 연구를 했던 연구원들? 그들이라면 잠뜰에게 좋은 방향으로 증언을 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들도 공범이다. 이 법정에서 그들을 증인으로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누구지? 잠뜰의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아 풀렸다. 공룡이 곧장 증인을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첫 증인으로 로마의 귀족이자 탐험가 수혀누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를 요청합니다.”
“수혀… 누구요?”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긴 한데 딱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법정 한 쪽 문이 열리며 남자 한 명이 들어온다. 그 얼굴을 보고 나서야 증인의 정체를 알았다. 그럴 만도 했다. 잠뜰은 그를 항상 데스파시또라고 불렀으니까. “선서는 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진실 여부는 우리가 알 수 있으니까요.” 공룡이 그를 증인석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그는 법정에 서는데도 별로 긴장한 기색이 아니었다.
“자, 수혀누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씨.”
“편하게 수현이라고 불러주세요.”
“오, 그 말을 바랐습니다. 좋습니다, 수현 씨. 수현 씨가 폼페이에서 탈출하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고말고요. 제 인생을 바꿔놓은 순간이니까요.” 잠뜰도 그때를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엄밀하게 따지면 그 순간 그곳에 있던 건 잠뜰의 의식의 일부였다. 하지만 그는 제가 바꾸는 과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폼페이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도착한 도시에서 간신히 탈출한 뒤 불타는 도시를 바라보던 강렬한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그 당시 만났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마르셀라님이었죠.”
“로마에서 마르셀라 씨와 있었던 일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그날 여행을 앞두고 휴양을 즐기고 있었어요. 거기서 마르셀라님을 만났지요. 사소한 충돌이 있었지만, 중요한 건 아니었고요. 문제는 제가 몰래 챙겼던 미네르바의 방패 때문에 생겼어요. 고의는 아니었으나 그 방패 때문에 신전에서 불이 꺼졌다는 거예요. 사제였던 마르셀라님이나 불을 꺼뜨리는 직접적 원인이 된 저나 로마에서 더 살아가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에 곧장 출항하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사실 마르셀라님과 저의 동행은 계획된 게 아니었어요. 그리고 배를 탔는데, 그때 갑자기 화산이 폭발하더군요. 도망자의 신세로 시작했으나 결론적으로는 저희 둘 다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수현의 이야기는 잠뜰도 익히 잘 아는 것이었다. 폼페이에서 도망 나오는 순간의 마르셀라는 잠뜰이었으니까. 그 뒤로 그는 마르셀라와 함께 그가 그토록 바라던 탐험을 하며 많은 발견을 해냈고, 박물관에는 그의 망토가 걸리는 발자취까지 남겼다.
“그 이후로 마르셀라 씨와는 계속 동행을 했습니까?”
“예. 함께 탐험을 했죠. 저희는 꽤 마음 잘 맞는 동료였어요. 그런데…….”
“말씀하세요.”
“관련이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저는 폼페이에서 만난 마르셀라님과 제가 함께한 동료 마르셀라님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수현이 숨을 고르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무감각하게 잠뜰을 스쳐 지나갔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그리 긴 시간도 아니니 잠깐의 이질적인 순간은 크게 의심을 사지 않고 넘어가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라니?
“마르셀라님은 그 당시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폼페이에서 탈출할 때의 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정신을 차려보니 모르는 사람과 한 배를 타고 있었다고 했죠. 그때는 그냥 화산폭발로 충격을 받은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깨닫게 되었습니까?”
“특별한 계기가 있던 건 아니고, 그냥 지내다 보니 알게 된 거예요. 전혀 달랐거든요.”
수현이 기억을 더듬는지 잠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게 불에 타는 폼페이의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것과 비슷했다. “그래서 저는 제게 수호천사가 있다고 믿었어요.” 진지한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나름대로 이해는 됐다. 죽을 뻔한 순간에 그를 피하게 해준 존재를 수호천사라고 믿으면 전부 설명이 되니까. 게다가 그는 신을 믿는 것이 당연한 시대의 사람이 아니던가.
“정말 수호천사인지는 모르지만, 덕분에 저는 제가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현 씨. 저희는 여기서 첫 번째 증인신문을 마칩니다. 검사 측에서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검사는 관심도 없는지 시선조차 주지 않고 대답했다. 그는 제 앞에 놓인 종이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애당초 수현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은 건 맞는지도 의심이 되었다. 잠뜰은 증인석에서 돌아 나가는 수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수호천사, 같은 걸 하려는 생각은 없었는데. 그와 함께 화산폭발로부터 탈출한 건 정말 우연이었고, 미네르바의 방패를 구하기 위해서는 그와의 동행이 필수적이었을 뿐이었다.
그 순간 수현과 눈이 마주쳤다.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그가 정확히 잠뜰을 돌아본 탓이었다. 잠뜰은 화들짝 놀라면서도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수현의 눈은 아까와 달리 어쩐지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그가 슬쩍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 미소가 왠지 익숙해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그는 잠뜰이 정신을 차리고 인사의 의미를 묻기도 전에 문을 열고 법정에서 나갔다. 휘날리는 망토 자락에서 어떤 후련함이 느껴졌다.
재판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공룡은 곧바로 다음 증인을 불렀다. 잠뜰은 이제 그가 누굴 부를지 정말 예상이 되지 않았다. 마법이라도 부렸는지 아무리 마셔도 줄지 않는 코코아를 한 모금 더 머금었다. 공룡이 다시 아무도 없는 방청객을 둘러보고서 큰 목소리로 다음 증인을 요청했다.
“두 번째 증인으로는 마야의 천문관이자 예언가 라더를 증인으로 요청합니다.”
수현이 나갔던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얼굴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감옥에 갇혀 있던 그 빨간 머리겠지. 잠뜰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함께 감옥을 탈출했던 남자가 증인석에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라더 씨. 신문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라더 씨는 공주 에케와 함께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감옥에 갇혔다가 탈출했습니다.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그 당시의 일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때는… 죽음을 각오한 상태였습니다. 나라의 평화를 위해 제물이 되기로 했거든요.”
“제물 말입니까?”
“예. 원래는 공주님께서 제물이 되기로 하셨는데, 막상 죽음을 생각하니 무서우셨는지 저에게 함께 하자고 하셨죠. 저는 흔쾌히 그러겠노라 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함께였던 공주님의 마지막을 지키는 건 제 의무이자 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공주님이 감옥을 탈출하신 겁니다.”
“그전까지 에케 공주는 순순히 제물이 되려고 했습니까?”
“예. 애초에 공주님이 바라셨던 일입니다. 공주님의 변화는 저에게도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기뻤습니다. 저는 내심 공주님이 나라가 아니라 공주님 자신을 위해 살길 바랐거든요. 그리고 아시는 대로입니다. 저희는 무사히 탈출했고, 저는 공주님과 헤어져 천문관이 되었습니다.”
“에케 공주의 변화는 라더 씨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영향이라……. 꼭 짚고 넘어가자면, 전 공주님과 함께하는 걸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라더가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공룡을 비롯하여 법정의 누구도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잠뜰은 아는 얼굴들을 마주할 때마다 빨라지는 심장 박동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그는 그가 만났던 이들이 아무도 그를 알지 못할 것이리라 여겼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잠뜰은 그들을 남의 몸을 빌려 만났다. 얼굴도 목소리도 남의 것을 하고서 마주한 상대가 자신을 기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오만에 가깝다. 하지만 가끔은 보이는 것을 넘어선 감각의 영역이라는 게 있다. 논리적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본능적인 직감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제가 그로 인해 자유로워졌다는 건 부정하지 못하겠습니다. 공주님은 평소와 달리 자신의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제 의견을 당당히 내세웠어요. 꼭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그건 어떻게 생각하면 제가 바라던 제 모습과도 같았죠. 그 순간을 기점으로 공주님도 저도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더 씨. 이번 증인신문은 여기서…….”
“잠시만요. 여쭙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라더 씨.”
“이 재판, 그때의 공주님과 관련 있는 거죠?”
단어 선택이 묘했다. ‘그때의 공주님’이라니. 공룡이 애매하게 고개를 기울이다가 재판장을 슬쩍 바라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태도였다. 여전히 재판장에게서는 이렇다할 대답이 나오지 않았지만 공룡은 도로 라더를 바라보았다.
“네, 맞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비밀이지만요.”
“아, 괜찮습니다.”
그는 더이상의 설명을 요구하지 않은 채로 재판장에게 인사했다. 검사는 지루한 표정으로 법정을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어차피 잠뜰의 죄에 대해서는 낱낱이 알고 있으니 그에게는 더 신문할 이유가 없는 모양이었다. 라더가 이번에는 잠뜰을 향해 섰다. 재판장에게 했던 것과는 달리 아주 오래전 지구에 존재했던 고대 마야의 인사법이 그대로 잠뜰에게 행해진다. “행운을 빕니다.” 그러고서 그는 감옥에서 나와 에케와 헤어졌던 그 순간처럼 멀어졌다.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잠뜰은 고개를 떨구었다.
인간은 이토록 이기적이다. 두근거림이 불쾌하지 않았다. 온몸이 기분 좋게 박동했다. 살아남은 세계는 ‘세상을 구한 잠뜰’은 없는 세계였다. 그 세계에도 잠뜰이 심어놓은 제 대리인이 존재했지만, 그게 자신 그 자체인 건 아니었다. 그러니 그곳에서는 애초에 없는 일인 셈이다. 어떠한 방식으로도 흔적이 남지 않는 삶이라는 건 몹시 고통스러운 삶이다. 인간은 누구나 제 흔적을 세상에 남기고 싶어한다. 긍정적인 방식이든, 부정적인 방식이든.
수없이 많은 세계를 멸망에 몰아넣고도 제게서 희망을 얻었다는 이들을 보며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이 인간인 탓일까. 허상이라 여겼던 타인의 인정 따위를 사실 바라고 있었던가.
“마지막 증인으로 호주의 물리학자 덕개를 요청합니다.”
고개를 들어 마지막 증인을 볼 자신이 없었다. 잠시 제게로 향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안녕하십니까, 덕개 씨.”
“네, 안녕하세요. 이렇게 증인으로 서는 건 또 처음이네요.”
쾌활한 목소리는 잠뜰이 그의 지하 연구소에서 들었던 것과 차이가 있었다. 아마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 거겠지. 누명을 쓰고 명예에 먹칠을 당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셀베이션 호가 발사되기 직전의 상황에 대해 기억하십니까?”
“물론이죠. 제 인생에서 가장 끔찍했던 시간인걸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네, 그러니까 그때… 제가 셀베이션 호의 심각한 오류를 발견한 게 시작이었습니다. 그들이 오류를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한 제가 바보였죠. 그대로 저는 누명을 쓰고 과학계에서 퇴출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그때 저를 도우러 온 게 테스였습니다. 제 친구이자 당시 잘 나갔던 박물관장이에요. 테스는 제가 만든 의식 전송 장치로를 가지고 셀베이션 호의 불안정한 원자로를 냉각시켰다고 합니다. 물리학에 관한 지식이 전무한 그 친구가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결과적으로는 우리 호주를 지킬 수 있었어요.”
“그 이후로 덕개 씨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셀베이션 호의 발사가 실패하면서 팀은 와해되었고, 팀원 중 몇 명이 양심 고백을 했습니다. 사실 치명적인 오류를 제가 발견했고 그 뒤에 누명을 썼다고요. 테스가 그 일을 해내지 않았다면 아마 저는 그대로 모든 걸 잃었을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마지막 증인신문도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검사 측 증인신문은 생략해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십시오.”
검사가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그때 덕개가 한 발자국 나서며 물었다.
“잠시만요. 재판장님, 혹시 제가 피고인에게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네, 하십시오.”
공룡이 재판장을 대신하여 허락했다. 그가 조금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때,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 보는 건 즐거운 경험이었나?”
잠뜰은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서 웃음을 터뜨렸다. 덕개는 자신이 한 질문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할 것이다. 잠뜰이 그의 기술을 활용한 것은 비단 셀베이션호의 발사를 막기 위함에만 있던 게 아니었다. 그의 연구는 훗날 타임 스테이션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말인즉슨, 잠뜰이 실행했던 크로노스 프로젝트는 전적으로 덕개의 연구에 빚을 졌다는 의미였다.
“즐거웠어.”
“…….”
“희망찼고.”
“그럼 다행이군.”
덕개가 미련 없이 법정을 떠나는 발소리가 들렸다. 고통으로만 여겨야 한다고 되뇌이던 시간 여행을 즐겁다고 말하기까지 얼마나 치열한 고뇌가 있었는지 아마 그는 모를 것이다. 잠뜰이 헛헛하게 웃었다. 지금 웃지도 않으면 그동안 꼭꼭 숨겨두었던 감정이 물밀듯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인간이란 정말 신기하군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를 단번에 알아보다니. 이게 바로 인간들이 말하는 유대감인가요?”
공룡이 흥미롭다는 듯 속삭였다. 이제는 잠뜰로서도 모르겠다. 그들이 잠뜰을 알아본 이유가 뭔지. 공룡은 잠뜰에게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앞선 세 증인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피고인 박잠뜰의 개입으로 인해 인생이 긍정적으로 변화했으며, 그 변화의 계기를 피고인으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단지 세계의 멸망만을 판결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 변호인 정공룡은 피고인 박잠뜰에 대한 형량을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 책상만 내려다보던 잠뜰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재판정 정중앙에 선 공룡의 옆모습이 보였다. 그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올라가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당당하고, 또 이상하리만치 자신 있는 미소. 잠뜰은 지난 이틀과 달리 거기에서 기묘한 안정감을 얻었다. 세상에 단 하나도 없을 것 같았던 이해자를 얻은 것만 같은 기분이 온몸을 감쌌다. 공부하지 않고서는 인간을 이해할 수도 없는 존재인데, 끝까지 그는 인간을 도통 영문 모를 생명체라고 평가 내렸는데. 그 순간 시선이 마주친다. 공룡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가 입을 뻐끔거렸다. 어떻게든 해준다고 했잖아요.
잠뜰은 진실로 지옥에 간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세계의 진실을 깨닫게 된 뒤로는 충분히 각오한 일이었다.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래로, 단 하나의 세계 존속을 위해 수많은 세계가 망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내내 그를 괴롭게 했었다. 그가 과거를 바꾸지 않는다면 탄생하지도 않았을 고통과 아픔이었다. 그런 고통이 복제되듯 나열되어 각각의 멸망을 맞이하는 걸 지켜보면서, 원죄를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에게는 그런 형벌이 마땅할 테다. 하지만 잠뜰은 그의 변호를 맡은 남자의 투명한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깊이 바라는 것은 따로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피고인 박잠뜰이 그가 구한 세계에서 생을 반복하도록 해주십시오.”
공룡이 재판장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꼭 숨긴 채다. 잠뜰의 놀란 두 눈을 마주하고 씩 웃었다. 인간들은 여전히 이해 못 할 생명체들이다. 그런데도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는 알 것 같다. 반대편에 서 있던 검사가 기가 막힌다는 웃음을 내비친다. 공룡의 의도를 알아챈 모양이다. 끝이라는 게 없는 이곳의 존재들은 멸망이 예비 된 세계에서 삶을 반복하는 걸 구원이 아니라 형벌로 여기니까. 그게 잠뜰에게는 바라마지않던 소원인 줄도 모르고. 그러니 재판장님, 그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십시오. 그가 구한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기 위한 기회를.
From.. 당신이 남겨둔 삶의 존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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