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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나는 춤을 춘다. 그에게 온전히 맞춰진 무대 장치와 그를 바라보는 수많은 쌍의 시선 앞에서.
조용히 깔린 적막 아래,
그가 숨을 내쉬고,
발을 디딘 채,
팔을 펴든다.
하나, 둘,
셋.
불이 켜진다.
아아, 드디어. 촉망받는 발레리나가 펼치는 죽음의 왈츠가...
"꺄아아아아아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울려퍼진다.
숨소리 하나마저 잡아낼 것처럼 고요하던 관객석에서 벌어진 이례없던 일이었다. 그게 신호탄이라도 된 것마냥, 사람들이 저마다 내는 수군거림은 순식간에 부피를 불렸다.
어둡게 깔린 무대 위에서, 오직 발레리나 그를 위해 마련된 조명은 볼품없이 쓰러진 발레리나를 비추었다.
처참한 모습의 발레리나를 두고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부산스러운 소리는 무대의 웅장한 규모와 공명하며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심지어 출구를 향해 뛰어가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시키는 자는 없다. 그저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발레리나에서 추락해 망가진 발레리나를 보고 겁에 잔뜩 질릴 뿐.
그 모든 광경을 목격하고 만 덕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
마치 붕 떠 있는 부유감을 주는 사람들의 소리가 시끄러웠나? 아냐. 귀를 현혹시키지 않는 쇼는 그만큼 묘미가 반감되는 법이지. 발레리나의 춤을 적당히 보조해주는 역할로써도 만족스러울테다.
다만 유망한 발레리나가 펼치는 무대에서 이런 음악과의 합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좀 더 장엄하고, 발레리나의 움직임을 묵직하게 받쳐줄 수 있는 소리가 더 어울릴 듯 싶었다.
할 수만 있었다면 내가 연주해줬을텐데. 덕개가 평이한 낯을 하고 생각했다. 안타깝지만 덕개는 악기를 다루는 데 재능이 없었다. 무용예술과 교수로서 음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직업을 가르치는 걸 업으로 삼고 있고, 따라서 몇 번이나 각종 악기들을 섭렵해 연주해볼 기회를 아끼지 않었는데도.
뭐, 난 예전부터 손재주는 없었으니까.
덕개는 거의 휑해진 관객석을 빤히 본다. 지금 도망친 사람들은 감히 발레리나와 함께 연주할 가치조차 없는 이들. 굳이 잡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단지 덕개의 역할은 무대에 선 발레리나와 걸맞은 연주자들을 데려오는 것에 그친다.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마음 먹은 이상 몇 데려오는 것은 문제 없겠지.
판단을 마친 덕개가 다시 침묵에 휩싸인 무대를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옮긴다.
기나 긴 장송곡을 무대로 옮겨오기 위한 작업은 시작됐다.
덕개의 뒤로 쓰러진 발레리나의 모습이,
천천히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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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면회입니다."
아, 꿈이었나. 두어번 눈을 깜빡였다. 줄곧 눈꺼풀로 감겨선 어둠에 익숙해있던 눈이 찌르는 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미간을 좁히게 만든다.
허리가 쑤시는 걸 보니, 오늘은 앉아서 잠들었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덕개는 혀를 찼다. 이 버릇도 슬슬 고쳐야 하는데. 낮잠 자체는 좋은데, 아무데서나 잠이 드는 건 곤란한 감이 없지 않았다.
무료하게 시간을 축내는 일이 주가 된 순간, 하루의 루틴 중 하나로 접어든 낮잠은 금세 사람을 진정시키게 만든다. 잠이 들고, 이따금 꿈을 꾸다 보면 자신의 처지는 모조리 잊고 그 어드매를 유영하게 만들지.
꿈은 언젠가 깨어나야 한다는 점만 아니라면,
참 좋을텐데.
실없는 잡념을 늘어놓던 덕개가 눈앞의 상황을 복기한다. 덕개는 무용예술과 교수고, 혜주의 오빠이며, 초호화 크루즈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고, 현재 신분은 243번 죄수다.
"면회입니다. 따라오세요."
딱딱한 표정의 간수는 꽤 긴장한 티가 역력히 보였다. 낯익은 얼굴이 아닌 걸로 봐서, 새로 충원된다는 간수 인원 중 하나인가보지. 신입인 주제에 날 담당하다니, 여기도 신고식 한번 거하게 치르는구만.
세간이 자신을 어떻게 평하는지 잘 아는 덕개는 짓궃은 여느 죄수들처럼 장난으로 몇 마디 말을 건네지 않았다. 다만, 싱긋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간수의 말처럼 나갈 채비를 했다.
감옥 생활은 예상했던 것보다 고되진 않았지만, 할 수 있는 행동 범위가 극히 제한되어 있는 만큼 감옥에서의 덕개의 일상도 달라지는 게 쉽지 않다.
정기적으로 매주 수요일마다 찾아오는 동생의 면회도 그런 부류였다.
매주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똑같은 패턴의 대화를 나누다, 마지막엔 혜주가 자리를 뜨면 덕개도 혜주와 정반대 방향의 독방으로 돌아가는.
나름 가장 기대하는 시간이라고, 혜주에게 말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울지도 모르겠어.
잠시 어린 시절의 혜주처럼 큰 눈 한 쌍에 가득찬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며 호두턱이 부들부들 떨리도록 우는 동생을 상상하다, 피식 웃은 덕개는 간수의 뒤에서 그를 따라 움직였다. 악명 높은 범인이 자길 보고 웃는다면서 힘이 바짝 들어가 있던 간수의 어깨가 좀 더 굳어진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젠 눈을 감고도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따라, 면회실에 도착한 덕개는 간수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능숙하게 자리를 찾아갔다.
좁은 창살을 사이에 두고, 덕개와 꼭 닮은 얼굴을 한 이가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조금 말랐나.
아무리 환자라도 해도 그렇지, 점점 야위어가는 모습에 걱정이 뻗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덕개가 틈 너머를 주시하며 얼굴을 찬찬히 살피던 중,
"오빠."
그의 동생, 혜주가 입을 열었다.
"......"
"난 요즘 괜찮아. 재활 치료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어. 처음엔 좀 망설였는데, 치료도 한두번 받기 시작하니까 아무것도 아니더라."
그래? 다행이네.
"오빠도 너무 걱정하지 마. 괜찮은 척 하는 게 아니고, 진짜 괜찮아서 그런 거니까. 알지?"
너만 괜찮다면야. 내가 더 이상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지. 덕개는 침잠하는 눈으로 혜주를 바라본다.
연쇄살인죄를 뒤집어쓴 친오빠와 주기적으로 면회를 가지는 것만으로도 혜주는 큰 부담을 안고 가는 중이다. 솔직히 헌신짝처럼 버려도 덕개 그는 혜주를 그리워하며 시들시들 말라가는 게 다였를텐데, 이마저도 제 동생의 바른 심성에 업혀가는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지.
물론 그는 어떠한 의견을 표명할 입장이 아니다. 이미 혜주에겐 주변이 시끄럽고도 남을텐데, 원인 제공자인 덕개가 나서서 뭐하겠는가. 덕개는 자신이 몇 마디 하는 걸로 혜주를 혼란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범죄자를 가까이 두는 것만큼 세간의 평판에 흠이 가는 일도 없는데. 아예 날 잊고 삶을 살아준다면 완벽할거야. 쓴소리는 역시 말하려는 시도에서 그쳤다.
"오빠, 알고 있어? 교도소에서까지 전해질 만큼 큰 소식은 아니지만, 그냥, 혹시나 해서......"
"......"
"후우, 됐어. 내가 말할게. 오빠랑 같이 크루즈에서 구조된 사람들 있잖아. 잠뜰이, 수현 씨, 공룡 씨."
움찔.
줄곧 무표정이던 덕개의 손가락이 움직인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오빠는 알았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분들은 계속 나와 접촉하려고 했었어. 아!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귀찮게 군 것도 아니고, 사과하고 싶다고 온거야."
사과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진심이 아니더라도.
"사실 전부터 계속 연락이 왔었는데...그동안은 내가 거절했어. 사과를 받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좀...나 스스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거든."
"......"
"그 사람들은 내가 굳이 사과를 받아두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 어쩌면 사과를 하는 것 자체도 자신들의 오만일 수 있다면서 말이야. 다만, 내가 사과를 바란다면 얼마든지 하게 해달라고. 물질적으론 채워질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금전적인 지원도 아낌없이 해주겠대."
"......"
"난, 사과가 누군가의 오만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 왜냐하면, 사과는 잘못을 했으면 응당 하는 최소한의 예의잖아? 받아주는 건 또 다른 문제지만, 사과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여겨본 적은 없어."
"......"
"근데 정말, 정말 이상하지...난 왜 사과를 받을 순간을 이리도 구구절절하게 미뤄왔을까. 마음의 준비, 라고 뭉뚱그려가며 여태까지 질질 끌고 온 내 마음을 내가 모르겠어."
앞에 선 혜주는 눈썹이 축 쳐져선 슬픈 표정을 짓는다.
어린 시절의 습관이 그대로 들었구나. 이때 곧장 달래주지 않으면 집안이 떠나가라 우는 소리가 들렸지.
회상하며 동생의 모습을 쭉 바라보던 덕개가 문득 깨닫기 시작한 건 그쯤이었다. 아, 넌 더 이상 쉽게 울지 않는구나.
그가 달래주지 않아도 될 만큼.
"그래도 오빠랑 이렇게 대화하니까, 드디어 내 마음이 어디로 기우는지 알 것 같아."
"......"
"아하하, 솔직히 오빠도 이걸 대화라고 해야될지 모르겠다는 거 인정하지? 말한 나도 민망하네."
조금.
난 네가 이걸 대화라고 불러줄 줄 몰랐거든.
"재활을 하면서 내가 느낀 건, 우선 무척 힘들었다는거야. 발레리나 생활하면서 체력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30분 하면 진이 빠져서야 원..."
"......"
"그치만 난 이제 누군가의 도움 없이 설 수도 있고, 걸을 수도 있어. 오래는 무리여도, 예전처럼 생활하기엔 끄떡없지."
"......"
"전부, 내가 다시 발레리나로 복귀하고 싶다는 생각만 포기하면 됐어. 당장이라도 내 삶을 끊어낼 것처럼 절망적인 상황들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렸다는거야."
넌 전혀 그걸 포기할 필요가 없었어. 그 새끼들이 잘못한 이유밖에 되지 못해.
덕개는 혜주의 시선 바깥에서 주먹을 말아쥐었다.
"알아. 이건 내 잘못이 아니고, 내가 포기할 이유도 없어."
"......"
"내가 선택한 거야. 과거에 연연하면서 남들을 원망하고 분에 못 겨워하는 내 모습이 싫어서. 그보단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 행복하게 웃는 내가 되고싶어."
"......"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에 허덕이는 건...너무 힘들더라."
오빠도 적당히 해. 혜주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당장이라도 출소하게 된다면 살아있는 셋 중 하나를 찾아가지 않을 자신이 없는 덕개로서는 가능성이 까마득한 일이었다.
"나, 사과는 받을거야.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아."
"......"
"딱 사과만 받을게. 사족을 붙였다 그 이상으로 더 엮이긴 싫어."
"......"
"의사 선생님 말로는, 좀만 있으면 내가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다더라고."
솔직히, 나 좀 기대돼.
발레리나 하면서 일정이 빠듯한 탓에 못 갔던 곳들, 몸 관리하느라 못 먹었던 것들도 잔뜩 있는데!
혜주는 말하며 가득 웃음지었다. 오랜만이네. 아니, 여기선 처음인가? 덕개는 혜주의 웃음을 마지막으로 본 날을 가늠했다.
"곧 면회 시간이 끝납니다."
"아, 벌써 시간이! 정신없이 떠들다보니 시간이 이렇게 됐네. 오빠, 그만 가봐야겠다."
"......"
"다음에 또 올게."
혜주는 벗었던 외투를 챙기고 의자에 걸어두었던 가방을 매며 나갈 채비를 했다. 여전히 입을 열지 않은 덕개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유독, 혜주의 경쾌한 발걸음이 눈에 밟혔다.
"잘 있어, 오빠. 그리고..."
앙 다문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던 혜주는,
"내가 오빠한테 이런 말 한 적 없었는데, 지금에서야 말할 용기가 생겨서 얘기해볼게."
지난날 내가 원망하고 증오하던 수많은 사람들 있잖아.
그 중에...오빠가 없었다곤 말 못 하겠어.
"......!"
아.
고개를 퍼뜩 들었다.
잡아야 해.
그렇지만 무엇을?
"면회 시간 끝났습니다."
의문이 채 들기도 전에, 혜주는 면회실을 빠져나가고 난 뒤였다. 덕개는 의자에서 못 박힌 것처럼 앉아있었는데도, 어딘가로 도망쳐버린 기분이 들었다.
우리 둘 다, 도망칠 이유는 없는데.
...그래야 하는데.
"......"
"이동하겠습니다. 따라오세요."
멍하니 자리에서 떠날 생각을 않는 덕개를 본 간수가 덕개의 어깨를 흔든다. 따라오세요.
주춤주춤, 겨우 일어난 덕개는 간수의 인도를 따라 가면서도 상념에 빠져 헤어나올 길이 없어보였다. 간수는 이를 이상하게 여겼지만, 도통 말이 없는 덕개에게선 짐작할 만한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덕개는 입을 열지 않을 자격이 없었을까? 애초에 그런 자격이란 건 무의미한 허상에 불과했을까? 덕개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단순히 두려워서, 무서워서 도망치고 만거야.
덕개는, 그는...
그야말로,
회피한 겁쟁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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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덕개는 꿈을 꾸었다.
웅장하고 장엄한 무대 위에서, 발레리나는 춤을 춘다.
거대한 규모를 가득 덮을 만큼 울려퍼지는 장송곡 아래, 덕개가 보았던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쇼를 펼쳤다.
다만 후에 발레리나는 쓰러졌으며,
덕개는 발레리나를 뒤로 하고
출구를 향했다.
From. 못난 너의 오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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